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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ieroon Feb 28. 2024

응급

까만 구두를 신고

2020년 9월 늦은 밤 중앙병원,

화장실 문이 열리고 유자색 오줌이 담긴 원기둥 모양의 플라스틱 용기를 들고 걸어 나오는 저 사람. 

응급실 제4 구역, 두 번째 간이침대에 K 94 마스크를 쓴 채 방치된 채 누워 있던 바로 그 남자다. 중절모만 씌워 준다면 지금 당장 런웨이를 걸어도 모자람이 없을 모델 같은 포스다. 그레이 스트라이프 패턴 면남방의 단추를 목 끝까지 채우고, 코발트 색 도톰한 아웃도어 하의가 마치 정장 바지를 입은 듯 꼿꼿하게 뻗은 노인의 매끈한 하체를 돋보이게 한다. 시선이 멈추는 황금색 버클- 고택의 비밀스러운 경첩 같기도 한-이 가죽 벨트를 조인 허리선 주변에 군살이라곤 하나 없다. 인턴 간호사의 지침대로 적당량의 소변을 작은 통 안에 수집한 후 바지 속으로 셔츠를 꼼꼼히 집어넣어 최대한 위로 바싹 당겨 입었을 잘 정리된 옷매무새를 보기만 한 것으로도 좁은 화장실 공간 안에서 애써가며 공들였을 그의 착복 과정이 떠오른다. 군더더기 없는 모습이다. 그리고 마지막 시선이 멈춘.


아, 완벽하게 반짝이는 저 까만 구두!

그는 오늘 밤 ER 응급실 제4 구역의 침대 하나를 배정받은 '자발적 응급환자'다.



오늘 저녁 아버지가 119를 호출해 응급실로 가시겠다며 급히 전화를 하셨다. 직접 호출하신 119 구급차를 타고 응급실 앞에 도착하자마자 선별 진료소에서 코로나 검사와 몇 가지 절차를 거친 후 응급실로 입장하신 뒤 당신 전신의 통증과 어지러움, 말을 더듬기까지 한 몇 가지 증상을 호소하셨을 거다. 


모니터를 바라보니 아버지의 맥박과 호흡은 안온한 상태다. 십여 분쯤 지났을까, 파란색 유니폼을 위아래로 입은 레지던트가 마스크와 투명 플라스틱 고글로 얼굴 전면을 가리고 환자의 상황에 대한 몇 가지 질문을 한다. 최대한 요약해 아버지의 상태를 전달하고 있으나, 매뉴얼대로 학습된 문장들만 쉼 없이 쏟아낸 후 돌아가는 모양새다. 숨도 한 번 쉬지 않고 급하게 말하는 의료인의 시선은 바닥만 향하고. 반복 배치되는 응급환자 아닌 응급환자들을 온종일 상대하면서 격하게 피곤할 수도 있겠으나 그의 무뚝뚝한 언행과 영혼 없는 태도에 보호자로서의 날이 선다. 


아버지는 너무 아파 입원하고 싶다 반복해 말씀하시지만, 죽음을 경계에 둘 정도로 맥박이 불안정한 응급환자가 아닌 이상 응급실에서는 진통제 주사 외에 해 줄 수 있는 처방이 없노라고 이미 수차례 통보받은 바. 





까만 구두 한 짝에 들어가지 않는 아버지의 부은 발을 보고 있자니 슬프기도 웃음이 나기도 한다. 자발적 응급환자는 그렇게 병원에 온 지 3시간 만에 보호자의 부축을 받으면서 다시 집으로 돌아간다. 새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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