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다시 사과를 그리기 시작했다

그림 이야기

by 지아나킴

사과는 나처럼 입시미술을 거친 사람들에게는 단순한 과일이 아니다. 내가 처음 정물화를 배우기 시작했을 때 제일 그리기 어렵기도 하면서도 유독 집착한 정물은 사과였다. 빨갛게만 그린다고 답이 아니고 그렇다고 어두운 명암을 가르쳐준 대로 넣으면 까맣게 탄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그러다가는 결국 못 먹는 썩은 사과가 되기 쉬웠다. 어느 날은 사과의 동그란 입체감이 잘 살아나게 그려내 스스로가 신통하기도 한 날이 있는가 하면 또 어느 날은 붓의 첫 번째 터치부터 꼴 보기 싫게 마음에 안 드는 날이 있었다. 그래서 그런지 사과는 화실의 테이블에 올라와 있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 큰, 피할 수 있다면 피하고 싶은 정물이었다.

그렇게 어려운 사과를 그림을 배운 지 겨우 10년째 되어서야 사과란 녀석에 대해 조금씩 알게 되는 깨달음의 시간들이 찾아왔다. 내가 알게 된 사과는 단순히 빨간 것도 아니었고 그라데이션이 일정한 것도 아니었다. 꼭 누군가 붓을 들고 노란색이 되었든 초록색이 되었든 빨간색이 되었든 사과의 곡선 위를 붓질해 그려놓은 것처럼 생겼다는 걸 알아차렸다. 그 위에 연두색 빛깔의 점들이 주근깨처럼 콕콕 박혀있었다. 동그란 것도 지구처럼 배가 동그란 게 아니고 가운데 사과의 속 씨앗에서부터 시작해 폭발하듯 사과의 광대뼈 부분이 가장 볼록한 형태가 사과의 특징이란 것도 알게 되었다. 그때부터 나만의 사과 이해법이 생겼고 더 이상 사과가 두렵지 않게 되었다. 그 뒤로 내게 사과라는 정물은 과거엔 정복의 대상자였으나 정복한 뒤에는 더 이상 특별하지 않아져 버린 정물이 되었다. 그저 아주 까다로운 사냥감 같은 정도로 기억돼버렸고 다시 그냥 과일 사과가 되었다.


그러다 또 십 년 정도가 흘렀다. 오랜 시간 나를 힘들게 한 편두통 발작증세와 여러 일로 회사를 잠시 그만두고 쉬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 이후 한국으로 이사 온 뒤 계획에 딱히 없던 세잔 전시회를 보러 갔다. 특히나 세잔에게는 사과는 그냥 과일이 아니었다. 그에게 사과는 구형태를 가진 정물 중 완벽한 것이었을까, 그래서 많이 그렸을까 궁금했다. 그렇다면 나에게 사과는 어떤 것일까 자연스럽게 물었다.


처음엔 그저 정물화에 자주 나오는 정물인 줄만 알았으나 이 과일은 나의 감정, 생각을 그대로 담아내는 대상이었단 걸 알게 되었다. 기분이 울적할 때 그린 사과는 덩달아 울적해 보였고 명랑한 날일 땐 행복해 보이는 사과가 되었다. 문득 사과를 다시 종이 위에 담고 싶어 졌고 사과 한 봉지를 사서 집에 돌아와 다시 꼼꼼히 쳐다보았다. 사과들의 생김새가 각기 다르듯 각자 다른 이야기들을 품고 있는 것만 같았다.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것은 사과로 나의 이야기를 하자는 목소리가 내 마음속에 울려 퍼졌다.


첫 번째 그림으로 오랜만에 곧 태어날 절친한 친구의 아기를 축복하는 마음을 듬뿍 담아 사과를 그리고 싶어졌다. 그리고 만약 내 아이 방에 걸어줄 그림을 그린다면 어떤 걸 그리고 싶을지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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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아이라고 생각하니 고민이 한결 더 진지해졌다. 흔히들 말하는 꽃길만 걸어라 란 그림을 그릴 수 없었다. 그 아이가 세상에서 만나게 될 태풍이나 고난이 있더라도 당차게 헤쳐나가길 바라는 마음이 가장 클 것 같았다. 요즘 책에서 많이 접했던 회복탄력성이 잘 훈련된 아이로 커가길 바라는 마음이다. 세 개의 사과는 삶의 세 단계라고 생각했다. 처음엔 순진무구한 사과였지만 비바람을 만나거나 벌레를 먹기도 해 상처가 생기더라도 회복한 뒤 햇볕을 고르게 받아 결국에는 빨갛게 익은 사과처럼 말이다. 그 앞에 놓인 초록색 붓은 창의성을 말하고 싶었다. 마음껏 그리고 상상할 수 있는 자유로움. 안경은 세상을 선명하게 볼 수 있는 도움의 장치. 연필과 그것에서 떨어져 나온 듯한 껍질들은 노력의 흔적이다. 하지만 이 그림을 가장 먼저 본 남편의 해석처럼 세 개의 사과 그 자체로 아이의 앞날을 축복하는 뜻으로 보아도 무방할 것 같다. 그림은 보는 이마다의 각자의 해석이 더 의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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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로 수채화물감만 써봤는데 이번엔 동양화물감을 써보았다. 덧바르면 바를수록 매력적인 색이 나오는 게 마음에 쏙 들었다. 쉽사리 완성되지 않고 시간을 더할수록 깊이 있어지는 동양화 물감덕에 나도 한 장의 그림을 빨리 끝내버리기 어려웠고 그 앞에 더 많이 머무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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