멈추지 않고 구르는 돌의 여행
구르는 돌은 이끼가 끼지 않는다. 19년 차 강사로, 한 가정의 일원으로 쉼 없이 구르며 살아왔다. 때로는 부딪히고 깎이는 과정이 고단했지만, 그럴수록 삶은 더 단단해졌다. 발치에 치이는 흔한 돌멩이에서 단단한 주춧돌이 되기를 꿈꾸며, 내 안의 '앤'을 만나러 캐나다 프린스 에드워드 아일랜드(PEI)로 향했다.
# 길 위에서 마주한 풍경 핼리팩스에서 샬롯타운까지 가는 방법은 다양하지만 육로를 선택했다. 미리 예매한 마리타임(Maritime) 버스에 올랐다. 5시간이 넘는 여정, 중간 거점에서 버스를 갈아타며 다른 곳에서 온 여행자들과 합류했다. 창밖으로 펼쳐지는 대서양의 풍경이 기막히게 아름다워 지루할 틈이 없었다.
샬롯타운은 PEI의 주도다. 어린 시절 TV 명작 만화로 보았던 빨간 머리 앤을 떠올린다. 노바스코샤 고아원에서 기차를 타고 와 매튜 아저씨를 만났던 앤. 그린 게이블스에서 샬롯타운까지 30마일이 걸린다고 했던 소설 속 그 장소에 내가 서 있었다.
# 1888년의 시간과 삶의 여유 숙소는 1888년에 지어진 캐나다 고택으로 정했다. 은퇴한 과학교사 출신의 호스트는 유쾌하고 활동적인 채식주의자였다. 오래된 집의 온기 덕분에 마치 앤과 동시대를 살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PEI는 랍스터로 유명하다. 도착하자마자 아들과 함께 랍스터 전문점을 찾았다. 2파운드짜리 신선한 랍스터와 랍스터 푸틴, 그리고 수제 맥주를 곁들였다. 토론토와는 달리 샬롯타운 사람들에게서는 특유의 여유가 느껴졌다. 오후 5시면 야외 카페에서 크래프트 비어를 즐기는 그들의 일상이 부러웠다.
# 언어를 넘어선 공감, 그린 게이블스 다음 날, 현지인 투어를 통해 캐번디시로 향했다. 가이드의 설명을 완벽히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상관없었다. 풍경을 보고 느낌을 나누는 것은 때로 언어보다 강력하다.
캐번디시는 캐나다에서 손꼽히는 감자 생산지답게 차창 밖으로 감자꽃이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한가로이 노니는 젖소들을 보니 이곳의 아이스크림이 왜 세계적인 맛인지 고개가 끄덕여졌다.
드디어 도착한 그린 게이블스. 앤이 살았던 집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방들을 보며 상상의 나래를 폈다. 앤이 다이아나를 만나기 위해 뛰어다니던 '사랑의 오솔길'을 걷는 동안, 내 마음속 앤도 함께 달리는 듯했다.
# 매사에 긍정적이고 낭만적인 앤처럼 전 세계 사람들이 이 작은 시골 마을을 찾는 이유는 무엇일까. 실제 인물도 아닌 소설 속 주인공의 흔적을 쫓는 이유는 그녀가 남긴 태도 때문일 것이다. 자신을 받아준 마릴라 아주머니를 위해 최선을 다해 감사를 표하던 앤, 매사에 긍정적이고 낭만적이었던 그 소녀의 영향력은 시공간을 넘어 우리에게 감동을 준다.
멈추지 않고 구르며 나를 깎아내는 과정도 결국 이와 닮아 있다. 거창한 신전의 기둥이 아니어도 좋다. 발밑의 작은 존재들을 소중히 여기며, 앤처럼 어제보다 조금 더 긍정적인 방향으로 구르고 싶다. 깎이고 부딪히며 다듬어진 내 진심이 누군가에게 작은 울림이 되기를 바란다.
앤의 집 : 줄을 서서 입장을 하면 앤의 방, 매튜, 마릴라의 방, 부엌 등등을 상상한 그대로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