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마흔둘이고, 늦둥이 둘째 아이는 이제 두 살이다. 두 살은 말을 다 하지 못하고, 마음은 다 표현하려 든다. 자기 감정은 급한데 표현은 미숙하고, 하루에도 수십 번 울다가 웃는다. 감정이 작은 그릇을 넘쳐 쏟고, 나는 그걸 매번 닦는다. 처음엔 웃으며 닦았다. 아이가 나를 불렀고, 내가 대답할 수 있다는 게 새삼 감사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웃음이 자주 멈칫한다. 자다가 우는 아이를 몇 번씩 안아 일으키고, 아이의 필요를 채워준 뒤 재우고 다시 눕는 밤이면 내 몸은 내가 아닌 것처럼 무겁다. 피곤은 쌓이는데 회복은 느리고, 마음은 괜찮다 하는데 몸이 괜찮지 않다. 첫째를 키우던 삼십 대의 초반과는 많이 다르다.
임신 중에도 나는 쉬지 않고 일했다. 내 사업이었고, 멈추면 안 되는 구조였다. 그땐 배가 불러도 참을 수 있었고, 아이가 뱃속에 있을 때는 어찌 됐든 잠을 잘 수 있었으니까. 그런데 아이가 세상 밖으로 나와서부터는 잠이 끊겼다. 밤엔 아이가 나를 부르고, 낮엔 일이 나를 부른다. 출근은 아홉 시고, 퇴근은 다섯 시지만 육아에는 퇴근이 없다. 일이 끝났다고 몸이 쉬는 건 아니었다. 저녁을 먹이고, 씻기고, 놀아주고, 재우는 사이 나도 함께 잠들어버리는 날이 많아졌다. 아이는 체력으로 크고, 나는 체력을 잃어간다.
육아는 마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하루를 반복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 안엔 온갖 일이 있다. 어제와 같은 시간에 울어도 이유는 다르고, 같은 간식을 줘도 오늘은 싫단다. 울음을 다독이는 방식도 매일 바뀌고, 사랑의 표현도 자꾸 달라진다. 아이는 매일 자라고 있고, 나는 매일 적응하고 있다. 적응이라는 말은 생각보다 더 수동적인 태도였다. 아이의 리듬에 맞춰 하루를 조정하고, 내가 어떤 사람인지는 잠시 미뤄두는 일.
요즘 들어 자주 기운이 없다. 이 고단함은 잠만으로도, 휴식만으로도 쉽게 회복되지 않는다. 하루를 버티기 위한 힘만 겨우 남겨두고 나머지는 아이에게 쓴다. 이전엔 아이를 재우고 나면 노트북을 켜고 글을 쓰거나 사업 아이디어를 정리했다. 지금은 그냥 멍하니 앉아 있거나, 아무 말도 없이 불을 끈다. 누구보다 아이를 사랑하고, 아이 덕분에 내가 살고 있다는 걸 안다. 그런데도 자꾸 힘이 빠진다.
내가 늦게 아이를 낳아서일까. 체력의 탓만으로 돌릴 수 없는 감정이 있다. 육아는 체력의 문제가 아니라 ‘다시 태어나는 과정’이기도 하다. 매일을 바닥에서부터 시작하는 느낌. 어떤 날은 이 작은 생명 때문에 눈물이 날 만큼 벅차고, 또 어떤 날은 이 작은 생명 때문에 아무것도 못 하고 있는 나 자신이 원망스럽다. 아이의 하루는 빠르게 지나가지만, 나의 하루는 어딘가에 머물러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아이는 나 없이 아무것도 할 수 없지만, 나는 아이 때문에 아무것도 못하는 날이 있다. 그건 죄책감과 무력감 사이에 길게 누워 있는 감정이다.
하지만 이 시기는 영원하지 않다는 걸 안다. 두 살은 곧 세 살이 될 것이고, 아이는 언젠가 나 없이도 잘 자랄 것이다. 나는 지금, 아이와 함께 자라고 있다. 아이가 말을 배워가는 동안 나는 침묵을 배우고, 아이가 걸음을 넓혀갈수록 나는 나의 세계를 잠시 접는다. 지금의 나는 이전보다 약해 보이지만, 사실 더 단단한 사람이 되어가고 있는 중이다.
어쩌면 나는 지금, 내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지도 모른다. 눈부신 하루는 아니지만, 뿌리처럼 단단한 날들. 이 작고 사랑스러운 존재가 엄마만 쫓아다니며 품에 안기는 시간은 아주 짧을 것이고, 나는 그 짧음을 조금이라도 길게 기억하고 싶다. 나의 바닥난 체력이 아이와의 시간을 소홀히 하지 않도록 마음을 다잡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