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초등학교 5학년, 햇살이 유난히 밝던 어느 날이었다. 담임 선생님이 교실 앞에서 말했다. “재능발표회를 할 거예요. 각자 역할을 정해봅시다. 오락부장을 추천해 보세요.” 아이들은 서로 눈치만 봤다. 발표회 사회를 맡는다는 건 그만큼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으니까. 그때 나는 손을 들지도 않았는데, 마음속에 작은 불이 켜졌다. ‘내가 하고 싶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말이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늘 조용히 구석 자리에 앉아있던 나는 그때까지 한 번도 자진해서 나선 적이 없었다. 하지만 그날은 달랐다. 수업이 끝나고 교무실로 찾아가 선생님께 말했다. “선생님, 저 오락부장 하고 싶어요.” 선생님은 놀란 눈으로 나를 보았다. 평소 정말 조용하고, 발표 한 번 제대로 하지 않던 애였으니까. “그래? 음… 그래도 다른 친구들 추천도 받아야 하니까, 일단 알겠어.” 선생님은 미소를 지으며 그렇게 말했다. 그날 집에 돌아가는 길에 나는 괜히 어깨가 으쓱했다. 뭔가 대단한 결심을 한 기분이었다.
며칠 뒤, 선생님은 교탁 앞에서 오락부장을 발표하셨다. “이번 재능발표회 오락부장은… 이손끝!” 순간 교실이 조용해졌다. 친구들의 시선이 내게 몰렸다. 늘 존재감이 희미하던 내가 갑자기 호명되었으니 다들 놀랄 만했다. 나조차도 내가 왜 이런 용기를 냈는지 몰랐다. 어쨌든 이름이 불렸으니 이제 물러설 수는 없었다. 나는 친구들 한 명 한 명에게 다가가 어떤 발표를 할 건지 물었고, 공책에 정리하며 순서를 짰다. 그러면서 느꼈다. ‘아, 나 이거 재밌다.’ 조용히 뒤에서 기록하는 게 아니라, 무언가를 이끌어가는 느낌이 들었다. 처음으로 내가 중심에 서 있다는 기분이 들었다.
나는 열심히 대본을 썼다. “지금부터 3학년 8반 재능발표회를 시작하겠습니다. 첫 번째 순서는…” 그 문장을 수십 번 중얼거리며 연습했다. 손때 묻은 종이는 점점 구겨지고 헤졌지만, 그게 내 자부심처럼 느껴졌다. 거울 앞에서 계속 리허설을 했다. 그날 밤, 나는 내 인생 최초의 ‘무대’를 앞둔 사람처럼 잠이 오지 않았다.
드디어 재능발표회 날이 왔다. 교실 앞엔 커다란 종이 플래카드가 붙었고, 아이들은 저마다 준비물과 소품을 챙기느라 분주했다. 내 차례가 되자 심장이 쿵쿵거렸다. 손에 쥔 대본은 이미 너덜너덜했고, 손바닥엔 땀이 흥건했다. 하지만 시작해야 했다. “지금부터 3학년 8반 재능발표회를 시작하겠습니다. 첫 번째 순서는…” 처음엔 목소리가 떨리고 얼굴이 화끈거렸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친구들의 웃음과 박수에 마음이 풀렸다. 긴장보다 재미가 앞서기 시작했다. 친구들이 준비한 춤, 노래, 콩트가 이어질수록 분위기가 고조되었고, 나도 어느새 천연덕스럽게 농담을 던지고 있었다. 룰라의 날개 잃은 천사를 공연하는 친구들의 뒤에서 골반 두드리기 춤을 같이 추기도 했다. 친구들이 웃었고, 그 웃음이 나를 더 용감하게 만들었다.
행사가 끝나자 선생님은 내게 다가와 말했다. “이야~ 너 오늘 정말 잘했어. 선생님은 네가 이렇게 밝은 친구인 줄 몰랐어.” 그 말이 내 마음을 두드렸다. 아마도 그날, 선생님이 다시 본 건 단지 ‘발표를 잘한 아이’가 아니라, 드디어 자기 안의 두려움을 뚫고 나온 나였을 것이다. 그날 이후로 나는 친구들 사이에서 ‘은근히 재밌는 아이’로 불리기 시작했다. 조용한 아이가 아닌, 진행 잘하는 아이, 말 잘하는 아이. 그게 얼마나 기분 좋은 변화였는지 모른다.
지금 생각하면 그날의 나는 세상에서 제일 큰 결심을 했던 것 같다. 누구도 시키지 않았고, 누가 추천해 준 것도 아니었다. 단지 스스로 손을 들었다는 그 사실 하나가 나를 바꿨다. 그날 이후 나는 깨달았다. 용기는 거창한 게 아니라는 걸. 무대 한가운데 서서 박수를 받는 것보다, 그 무대에 올라가겠다고 ‘말하는 순간’이 진짜 용기라는 걸. 그날의 경험은 지금의 나를 만든 첫 장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