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가 AI보다 못하네요.

by 이손끝

"전문가시니까, 알아서 잘해주세요."

처음엔 이 말이 나를 믿는 신뢰의 말로 들렸다. 하지만 고객의 그 한마디는 달콤한 독배였다. 아무런 가이드도, 원하는 콘셉트도 없는 '백지상태'의 의뢰. 하지만 나는 그 막막함을 책임감으로 채웠다.


고객의 사업 아이템을 톺아보고, 시장의 디자인을 분석해 보고, 이 명함이 누군가의 손에 쥐어졌을 때 전해질 신뢰의 무게를 가늠해 시안을 만들었다.


폰트의 자간 하나, 로고의 위치 1mm까지도 그의 비즈니스를 대변한다는 마음으로 일러스트레이터(ai)의 패스를 정성껏 그어 나갔다. '알아서'라는 말 뒤에 숨은 그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기 위해 보낸 고요한 몰입의 시간이었다.


드디어 정돈된 시안을 보냈다. 화려하진 않아도 탄탄한 기본기와 인쇄 공정의 완벽함을 갖춘, 전문가로서의 정답지였다. 그러나 돌아온 피드백은 예상치 못한 곳에서 날아온 둔기 같았다.


"제미나이로 돌려보니까 이게 훨씬 나은데요? 3D 캐릭터도 넣고 배경도 이렇게 멋지게 안 되나요?ㅋㅋㅋ"

고객은 내가 보낸 시안을 인공지능에 집어넣어 변형시킨 뒤, 마치 자신의 감각인 양 내보였다. 비웃음 섞인 말투에는 '실력이 기계만 못하다'는 조롱이 서려 있었다.


그가 보낸 이미지는 이미지로 되어서 인쇄용 벡터 데이터의 정교함이나 실제 출력물의 가독성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오로지 눈을 자극하는 화려한 픽셀의 나열만이 그에게는 '실력'으로 보였던 것이다.


처음부터 이런 취향이 있었다면 참고 자료라도 건넸어야 했다. 하지만 그는 나의 수고를 테스트 베드로 삼았고, 기술이라는 치트키로 전문가의 자존심을 짓밟는 데서 묘한 우월감을 느끼는 듯했다.


그 순간, 내 안의 '성의'의 마음은 급격히 식었다. 이어지는 수정 요청들 앞에서 나는 기계적으로 마우스를 움직였다. 어차피 내가 어떤 고민을 담아도 그는 다시 인공지능의 필터를 씌워 난도질할 테니까.


디자인을 업으로 삼으며 느꼈던 긍지는 순식간에 '대체 가능한 소모품'이 되었다. 도구를 다루는 숙련된 손길보다, 명령어를 입력해 얻어낸 우연의 산물을 더 숭배하는 이에게 나의 진심은 사치였다.


고객의 피드백에 당황했다가 화가 났다가 문득 서글퍼졌다. 기술은 눈부시게 발전했지만, 타인의 노력을 대하는 예의는 퇴보한 현장. '알아서' 해달라던 그 무책임한 의뢰는 결국 가장 무례한 결말로 매듭지어졌다.


명함 한 장에 담으려 했던 나의 정체성은 차가운 모니터 속 3D 캐릭터 뒤로 자취를 감췄고 내 손에서 나온 거라 할 수 없는 디자인이 최종 컨펌됐다. 제미나이가 만든 명함이 인쇄가 들어갔다.


내내 슬펐던 것은 AI의 멋진 실력이 아니었다. 인간과의 대화를 마치 인공지능과 하듯 이거 해봐 이거 해봐 식으로 하는 고객의 가벼운 태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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