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쇄기획소 편집팀의 모니터 앞, 단축키를 두드리며 명함과 팜플렛의 자간을 맞추던 시절이 있었다. 그때 내 세상의 전부였던 종이와 잉크의 냄새는 결혼과 육아라는 긴 터널을 지나며 잊혔다. 다시 사회로 돌아가려 했을 때, 세상은 나에게 '나이'와 '시간'이라는 높은 벽을 내밀었다. 결국 내가 선택한 것은 창업이었다. 내가 가장 잘하는 디자인으로 나만의 성을 쌓아보기로 한 것이다.
하지만 현장에서 마주한 현실은 차가웠다. 이미 레드오션이 된 인쇄물 시장은 단가 경쟁이 치열했고, 자금이 많지 않은 내가 그 거대한 흐름에 올라타기엔 역부족이었다. 그때 나는 본능적으로 '사이드 잡(Side-job)'를 살피기 시작했다. 주업의 한계를 넘기 위해 시작한 온라인 디자인 판매라는 부업. 그런데 묘한 일이었다. 시장을 유심히 관찰하며 가볍게 던져본 부업 아이템들이 예상치 못한 지점에서 주업보다 뜨거운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시장은 생명체와 같아서 영원한 주류는 없었다. 어떤 아이템은 떴다가 서서히 저물어가고, 이름조차 낯설었던 새로운 아이템이 급부상했다. 안정적인 것을 좋아하는 나는 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사양 산업이 돼가는 내 아이템을 살려보려 노력했지만 소용없었다. 번아웃이 왔고 경제 사정도 점점 어려워졌다. 그 변화의 파도를 직접 몸으로 겪으며 나는 결심했다. 내 주업을 영원히 고정해두지 않기로.
부업이라면 적어도 월 100만 원은 벌어야 유지할 가치가 있다.
최근 한 커뮤니티에서 이 글을 읽었다. 효율성을 따진다면 맞는 말이다. 하지만 내 생각은 조금 다르다. 당장의 수익이라는 잣대로만 부업을 평가하면, 그 아이템이 가진 잠재력과 충분한 실험의 기회를 박탈하게 된다. 사업에는 분명 '운'이라는 요소가 작용하지만, 그 운조차도 끈질긴 인내 속 실험 끝에 마주치는 필연에 가깝다. 월 100만 원이 안 된다고 버렸다면, 오늘날 나의 주업이 된 아이템들은 세상 빛을 보지 못했을 것이다.
열심히 생존해야 한다. 이제 세상은 또 한 번의 거대한 파도를 예고하고 있다. 실제로 요즘엔 직접 AI를 활용하는 고객들이 늘어나고, 디자인의 정의 자체가 변하고 있다. "이 시대에 나는 그들에게 어떤 서비스를 제공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은 밤잠을 설치게 할 만큼 무겁고 피곤하다. 하지만 이 피로감은 정체된 자의 괴로움이 아니라, 다음 목적지를 찾는 여행자의 긴장감에 가깝다.
나에게 사업이란 하나의 감나무 밑에서 입을 벌리고 감이 떨어지기를 기다리는 일이 아니다. 잘 익은 감이 달린 나무를 찾아 부지런히 발걸음을 옮기고, 나무를 흔들어 떨어진 결실을 주운다. 어떤 나무는 내가 생각지도 않았는데 많이 떨어지기도 한다. 왜지? 그 나무의 특징과 떨어진 과육을 분석하고 다시 감 떨어질 나무를 찾는 걸음, 이게 내가 부업으로 시작해 주업으로 만든 과정이다.
비록 발바닥은 부르트고 고단하지만, 나는 오늘도 사이드 프로젝트라는 이름의 작은 실험들을 멈추지 않는다. 영원한 주업이 없다는 사실은 때로 불안을 주지만, 동시에 언제든 새로운 기회의 나무를 찾을 수 있다는 희망이기도 하니까. 이 피곤한 여정이 결국 나를 가장 단단한 생존자로 만들어줄 것임을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