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혜가 갑자기 금요일에 만나자고 했다. 한 곳의 링크를 보내면서 사색과 독서를 즐기자며 나를 덕수궁 근처로 초대했다. 지각하는 모습이 지겨워서 그 습관을 고쳐보고자, 최근 약속시간보다 두 시간 일찍 나가는 연습을 시작했다. 아무튼 약속은 1시간 거리의 장소에서 2시인데, 12시에 나왔다는 소리다. 시청에 내렸다고 문자를 보냈더니 지혜에게서 전화가 왔다.
“야! 약속 두 시였어? 내가 두 시라고 했어?”
“몰라. 두 시 아니야? 내가 그랬나?”
“거기 예약 세 시인데? 어떡하냐. 나 지금 밥 먹고 빨리 출발할게.”
"아냐, 괜찮아. 천천히 와!"
얼떨결에 한 시간 반이나 여유 시간이 생겨버린 나는 차라리 잘됐다 싶었다. 바리바리 싸 온 키링의 상세 이미지를 찍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지금은 가을이고, 시청역에는 내가 서울에서 제일 사랑하는 덕수궁이 있다.
친구들 사이에서 나는 유독 궁을 좋아하는 사람으로 소문이 나있다. 중학생 때 서울에 전학을 온 이후에 틈만 나면 덕수궁에 왔다. 다른 궁은 감흥이 없었다. 이유는 아직도 모른다. 좋아했던 소설의 주인공들이 궁에 놀러 왔다가 경비를 피해 숨어있던 장면이 좋아서 그런가? 아니면, 우거진 나무 뒤에서 펑펑 울어도 아무도 내게 관심이 없기 때문일까?
어릴 때부터 광화문 근처에서 일하는 게 꿈이었고, 실제로도 그 꿈을 이뤘었다. 그때는 점심시간만 되면 밥을 굶고 덕수궁에 왔다. 남자를 사귈 때도 꼭 한 번은 덕수궁에 데려왔다. 가을의 덕수궁은 내 것이 아닌데도, 보여주기 아까웠다. 제일 사랑했던 d와 왔던 날은 아직도 오늘 아침처럼 생생하다. 아무 말 없이 앉아서 석조전을 바라보다가 또 눈물이 났다. "그동안 여기 앉아서 운 기억밖에 없는데, 오늘은 마음이 따뜻해서 좋아."라고 했더니 그 애가 나를 가만히 쳐다봤다. 우리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위로받았다.
아무튼! 나에게 덕수궁은 여러 기억이 섞여 있는 이상한 곳이다. 키링 사진을 찍으려고 나뭇잎을 줍고 있었는데 짐이 한가득인 중년 여성분이 내게 시간을 물었다. “1시 48분이요!”라고 했더니 이 근처에 핸드폰 배터리를 충전하는 곳이 어디인지 아냐고 물었다. “글쎄요, 잘 모르겠어요. 죄송해요.”라고 했더니 곧 기차를 타야 하는데 배터리가 없단다. 아침에 무거워서 챙길까 말까 고민했던 보조배터리를 꺼내서 “너무 잘 됐어요. 제가 오늘 아침에 보조배터리를 챙겼거든요. 이거로 충전하실래요?”라고 했다. 내 옆에 잠시 앉아 있어도 괜찮겠냐고 물으시곤 한참을 앉아 계셨다. 요리조리 키링 사진을 찍는 내게 만든 거냐고 하시길래, 책을 파는데 돈이 잘 안 돼서 팔아보려고 만들었다고 했다.
낯선 사람 앞에서 스스럼없이 내 이야기를 하는 건 꽤나 익숙한 일인데도 어쩐지 낯설었다. 덕수궁에서 나를 모르는 사람과 대화해 본 것이 처음이라서 그랬나? 주절주절 책을 쓰게 된 이야기부터 시작해서 두 번째 책이 나왔다는 것까지 다 토해냈다. 그분이 갑자기 가방을 뒤적거리시더니, “책 한 권 주세요.”라고 하셨다. “아, 책이 한 권 있긴 한데 오늘 만날 친구에게 줄 책이라 사인이 되어있어요.”라고 했다. 사실 사인이 안 되어있는 새 책이었으면 지혜에게는 다음에 준다고 하고 그분께 팔 생각이었다. 지금의 나에게 13,000원은 20년 친구와의 약속보다 소중하다.
그랬더니 그럼 그 책 구경만 시켜달라고 하셔서 비닐포장을 뜯어서 건넸다. 한참을 보시더니, 교보문고에 가려고 했는데 기차 시간이 어중간해서 못 가겠다고 하신다. 아까 집을 나서면서 교보문고에 4권의 책을 택배로 접수하고 왔는데, 실수로 한 권 더 챙길걸... 아쉬운 마음에 명함을 건네드렸다. 아침에 명함을 챙기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어디에서 오셨냐고 물었더니 대전 분이라고, 석조전에서 하는 미술전을 오래도록 기다렸고 아침 10시에 도착해서 지금 나왔다고 하셨다. 대전. 대전. 대전. 다시는 가고 싶지 않은 도시. 퇴사한 전 회사의 본사가 있는 도시다. 이 얘기까지 해버렸다. 처음에는 빵 사는 게 좋아서 출장만 잡히면 너무 좋아했었는데, 이제는 전 회사가 끔찍해서 성심당도 그립지 않다고 했다. 갑자기 종이 백을 뒤적거리신다. 명란 바게트다. “그래도 맛있는데... 아침에 내가 사 온 거라 절반밖에 안 남았는데 이거 먹어요."라고 하시길래 신나게 받았다. 그렇게 수다를 떨다 보니 기차 시간이 다가왔고, 나도 약속 시간이 다 되어서 가야 했다.
“오늘 이렇게 우연히 만나서 대화할 수 있어서 너무 좋았어요.” "나도요, 배터리 빌려줘서 고마워요.” “핸드폰 사용 안 하실 때는 비행기 모드로 해놓으세요! 날이 추워서 방전이 빨리 돼요.” “알았어요, 줄 게 이거밖에 없네. 귤 두 개예요. 먹어요. 정말 고마워요! 갈게요.” “어머, 고맙습니다! 잘 먹을게요. 조심히 가세요!”
오늘 약속시간을 착각하지 않았더라면, 평소처럼 지각을 했었더라면, 어젯밤에 지혜에게 보여 줄 키링을 미리 챙기지 않았더라면, 오후 4시에 배달 예정이었던 내 두 번째 책이 이른 아침에 오지 않았더라면, 오늘 아침에 가방에 있던 보조배터리를 뺐더라면, 그분이 내게 묻지 않았더라면...
오늘 하루는 또 다르게 쓰였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 많은 우연들이 만들어 준 작은 곁가지들이 자라나, 내게 또 다른 덕수궁에서의 소중한 기억을 선사해 줬다. 모든 외로움을 토해냈던 10대의 나날도, 꾹꾹 참아내던 내 옆모습에 머물렀던 d의 시선도, 미래 걱정에 배고픔도 잊은 채 하염없이 거닐었던 점심시간들도, 지안 씨가 석조전을 배경으로 찍어준 내 첫 책 사진도, 그리고 절반만 남은 성심당의 명란 바게트와 귤 두 개는 이곳, 덕수궁에 고스란히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