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여일 18,070일
전자책 서재에 유일하게 '50년대여'를 한 책이 있다. 6개월 전 한 온라인 서점에서 '나니아연대기 50년대여' 상품을 발견하고, 50년이면 평생 소장과 다를 것이 없는데 구매보다 저렴하다며 신나서 주문을 완료하였다. 이벤트 할인 상품을 발견하면 구매욕구가 솟는다. 마치 아주 오래전부터 이 책을 너무 갖고 싶었다는 착각에 빠지기 쉽다.
나는 이 책을 너무 읽고 싶었다는 거짓 착각 속에 구입을 완료하고, 6개월이라는 시간이 지났다.
손에 잡히지 않은 것에 대한 갈망은 시간이 지날수록 극대화되지만, 구매와 동시에 욕구는 해소되었으니 느긋하게 미뤄두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나의 눈길을 빼앗지 못한 존재가 된 '나니아연대기'에 이상한 숫자가 눈에 띄었다. '남은 대여기간 49년 6개월'
49년 6개월이라는 숫자가 너무나 생경하다.
'49년 6개월이면 이제껏 내가 살아온 시간보다 조금 더 남았구나. 어디 보자.... 그때쯤이면 내 나이는 92세, 우리 딸은 61세. 긴 시간이네.'
막연한 시간을 생각하다 불현듯 계산기를 두드려보았다.
내가 살아온 시간 15,892일, 이 책의 남은 대여일은 18,070일.
지금까지 살아온 시간을 구체적 숫자로 확인하니 차가운 겨울바람에 머리가 깨질 듯 시리지만 눈이 환하게 밝아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내가 지금 15,892일째 숨을 쉬고, 밥을 먹고, 잠을 자고 살아왔구나!'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의 삶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빨려가서 빠른 속도로 현재로 달려오는 내가 보였다.
3살 무렵 빨랫줄에 매달리다 떨어지던 기억부터 초등시절 하굣길에 비를 맞으며 집으로 달려가던 기억, 엄마품에 안겨 행복했던 기억, 대학교 개강 첫날 강의실의 낯선 이들의 얼굴이 빽빽하던 순간의 긴장감, 크리스마스이브 심야근무 중 들었던 박효신의 '눈의 꽃', 결혼식을 마치고 공항 가던 길에 본 석양, 딸아이를 처음 품에 안은 순간 등 내 인생의 엄청나게 많은 점들이 찍힌 자리를 점잇기하듯 기억들이 줄줄이 이어져 엄청나게 큰 혼돈과 감흥이 덮쳤다.
'사십여 년'이라는 단어로 뭉뚱그려졌을 때는 감각하지 못했던 세밀한 기억들이 '15,890'이라는 숫자를 마주했을 때는 최소 15,890번의 다른 날들로 채워졌던 나의 지난 삶이 현미경을 들이 대고 보듯 명료하게 보였다. 내가 살아온 시간이 '인생 다 그렇지 뭐'로 퉁칠 수 없는 유일한 삶이었다는 사실이 선명하게 인식되자 갑자기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앞으로 남은 대여기간 18,070일은 내가 살아온 날보다 조금 더 남은 시간이다.
지난날 내가 하지 못했던 일들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간다. 하고 싶은 게 많았지만 하지 못했던 던일들이 떠오른다. 지금부터 시작한다고 해도 늦지 않았음을 남은 숫자가 증명해 주었다.
나이 듦에 항복하며 주춤주춤 하던 내 마음에게 18,070번의 아침을 맞이할 수 있다는 기대가 꿈틀대고 일어난다.
신께서 내게 허락해 주신 시간이 얼마나 남았는지 알 수 없다.
내가 얼마나 더 내 사랑하는 가족 곁에서 함께할 수 있는지 알 수 없다.
하지만 내게 책의 대여일만큼의 삶이 허락된다면 나이를 탓하며 골골거리는 육신도 충분히 고쳐 쓸 수 있겠다는 확신이 든다. 나이를 탓할 시간이 없음을 깨닫게 된다. 우리 딸 시집도 보내야 하고, 남편과 오붓하게 살 마당 있는 집도 지어야 하고, 미래의 손주들과 신나게 놀아주는 유쾌한 할머니가 되려면 지금부터 부지런히 점을 찍어놔야 한다. 죽는 날까지 읽어야 할 책들이 너무 많은데 허리와 목이 아프지 않으려면 지금부터 다시 몸을 회복시켜야 한다.
지금까지 마흔두 번의 봄을 맞이했다. 그 봄이 너무 짧았고, 벚꽃을 본 경험이 너무 적었다고 하소연했었다. 하지만 만일 50번의 봄이 내게 남아있다고 생각하면, 매년 찾아오는 봄을 더 반갑고 더 살갑게 맞이할 수 있을 것 같다. 올해의 벚꽃이 작년과는 어떻게 다른 모습인지, 어디에서 봄을 맞이하게 될지, 누구와 가장 찬란한 봄을 마주하게 될지를 기대할 수 있을 것 같다.
갑자기 마음이 바쁘다. 제발 남은 대여기간의 숫자만큼만 더 살 수 있길 바라는 간절한 소망이 마음 깊은 속에서부터 피어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