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의 뒷모습을 보고 헤엄치는 일: 소설 <나나 올리브에게>
수많은 ‘만약에’ 중에, 왜 이것일까요.
이별을 받아들이고, 무력감을 받아들이고, 슬픔을 받아들이고, 이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삶을 받아들이고. 이 삶에서는 그저 받아들이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게 없어요.
나는 나나가 받아들인 삶에 대해서 생각해요. 그리고 내가 받아들이게 한 삶에 대해서도. 숨을 들이켜듯이 받아들이고, 다시 내쉬듯이 체념해 버린 우리의 삶을요.
<나나 올리브에게 중에서 p52>
'당신의 코흘리개‘는 편지를 씁니다. 전쟁이 언제 끝날지 모르는 이 폭풍 속 촛불과 같은 삶 속에서 숨을 들이켜듯이 받아들이고, 다시 내쉬듯이 체념해 버린 우리의 삶을 받아들였던 나나 올리브에게.
좌절과 무력함이 가득한 시간 속에서 나나 올리브는 사랑하는 이들을 잃었습니다.
작고 힘없는 삶을 지탱해 주던 사랑하는 이들을 잃었지만, 그들과 숨 쉬고 두 발을 내디뎠던 자신의 올리브 나무 집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나나 올리브는 코흘리개의 말처럼 과연 삶을 체념해 버렸던 것일까요?
코흘리개는 긴 시간이 지나 나나 올리브처럼 나이가 들었을 때 분명 알았을 겁니다.
그건 삶을 체념했던 것이 아닌 깊은 슬픔 속에서도 타인의 삶을 길어 올린 삶이었다는 것을요.
나나 올리브는 올리브 나무집에서 스쳐가는 수많은 인연의 쉼터가 되어주었습니다.
“사람들 사이에 떠도는 이야기가 있었대요. 아무 데도 도망갈 곳이 없게 되면 북동쪽 어딘가에 있는 올리브나무 집으로 가라고. 아무도 살지 않는 버려진 동네에 개와 할머니가 지키고 있는 집이 있다고요. 소년은 그게 진짜일 줄은 몰랐다고 했어요."<나나 올리브에게 중에서 p126>
바람은 또 어디에서 불어오는지
내 맘에 덧댄 바람에
창 닫아보아도
흐려진 두 눈이 모질게 시리도록
떠나가지 않는 그대
혼자라는 게
때론 지울 수 없는 낙인처럼
살아가는 게
나를 죄인으로 만드네
- 루시드 폴 <바람, 어디에서 부는지>
살아남은 사람들은 살아있는 자체가 죄인처럼 고통스럽습니다. 사랑하는 이들을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과 후회 그리고 시대의 폭력 앞에서의 무력함으로 숨을 쉬는 것조차 힘겨웠을 겁니다.
그런 그들은 세상 어디도 도망갈 곳이 없습니다. 내 작은 육신하나조차 도망칠 수 없다는 사실이 그들을 더 슬픔 속으로 밀어 넣습니다.
올리브 나무 집은 ‘아무 데도 도망갈 곳이 없게 되면 북동쪽 어딘가에 있는 올리브나무 집으로 가라고’ 믿던 이들을 말없이 품어주는 곳이었습니다.
나나 올리브가 자신의 슬픔과 상실을 품고도 그곳에 머문 이유를 ‘당신의 코흘리개’는 분명 알게 되었을 겁니다.
“둥글게 둘러앉은 사람들이 서로의 사정을 털어놓아요. 나도 내 이야기를 털어놓고요.
전쟁이 아니었다면 평생 마주칠 일이 없었을 사람들은 서로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모르지만, 그럼에도 서로의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듣고 “나도 그래”“다들 그렇게 살지.”라는 말을 해 줘요.
사람들은 모두 비슷한 슬픔을 안고 있어요. 그 사실이 나를 버티게 해요. 가끔은 슬픔이 턱밑까지 차올라서 그만 잠겨 버리고 말 것 같을 때, 내 옆에 나처럼 턱밑까지 차오른 슬픔 속에서 천천히 앞으로 헤엄쳐 가는 사람을 보게 되는 거예요. 그러면 나도 아, 아직 괜찮구나, 하고 따라서 헤엄을 쳐요. 헤엄치는 나를 보고 또 다른 누군가 역시 헤엄을 치겠지요.
우리는 이렇게 시커먼 슬픔 속에서 아슬아슬하게 줄지어 헤엄을 치고 있어요. 나를 위해서, 그리고 서로를 위해서요." <나나 올리브에게 중에서 p104-105>
올리브 나무 집에서는 모두가 서로에게 ‘나도 그래’ ‘다들 그렇게 살지’라는 말을 서로에게 건넵니다.
슬픔이 내게만 찾아온 줄 알았는데, 그 슬픔이라는 손님이 다른 이들에게도 찾아간다는 사실을 우리는 서로의 말에서 깨닫게 됩니다.
나의 슬픔이 다른 이의 슬픔과 같은 순 없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슬픈 존재이기 때문에 다른 이의 슬픔을 볼 수 있습니다.
"가끔은 슬픔이 턱밑까지 차올라서 그만 잠겨 버리고 말 것 같을 때, 내 옆에 나처럼 턱밑까지 차오른 슬픔 속에서 천천히 앞으로 헤엄쳐 가는 사람을 보게 되는 거예요. 그러면 나도 아, 아직 괜찮구나, 하고 따라서 헤엄을 쳐요. 헤엄 치는 나를 보고 또 다른 누군가 역시 헤엄을 치겠지요. "
코흘리개는 분명 알았습니다. 나나 올리브가 슬픔 속에도 숨을 멈추지 않고 헤엄치는 이들의 뒷모습을 보았고
나나 올리브 역시 그 뒷모습을 따라 숨을 멈추지 않고 헤엄을 치고 있었다는 사실을요.
그리고 그녀의 뒷모습을 다른 이들 또한 바라보고 헤엄을 쳤습니다.
우리는 삶을 체념한 것이 결코 아니었습니다. 서로의 삶을 슬픔의 심연에서 길어 올리고 있었습니다.
“구멍이 나 버렸다고 해서 그렇게 나쁜 것만은 아니야. 그 구멍을 채워 주는 것들이 생길 테니까.”
정혜윤 작가님의 ‘삶의 발명’에서 우리를 헤엄치게 하는 이들의 뒷모습이 있습니다.
[당시 희생자 대책위를 만든 유족들은 질문을 던졌다. “가족을 잃은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복수를 꿈꾸는 자, 냉소주의자, 은둔자, 알코올 중독자, 이중 어떤 것이 되어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이것은 정의의 문제였고 고독의 문제였다. 가족의 목숨을 잃게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사건 후에도 여전히 정의롭지 못한 세상에서 유족들은 고독했다. 유족들은 많은 것이 될 수 있었지만 가장 어려운 정체성을 택했다. 바로 ‘사랑하는 자’였다. “아직 우리들에게는 지켜야 할 것이 있지 않은가?”]
[“유족들은 한결같이 “내가 이렇게 슬프지 않았더라면 몰랐을 게 너무 많아요”라고 말한다. 그들의 슬퍼하는 눈에는 보이는 것이 있다. 그들은 비극이 자꾸 일어나는 것에 대해서 기이한 책임감을 느꼈다. 그들은 견딜 수 없는 일을 겪었지만 그 일을 재료로 그나마 견딜 수 있는 세상을 만들려고 했고 타인이 살아갈 힘을 뺏기는 일이 없는 데 힘이 되려고 했다. 그들이 이렇게 한 이유는 뭘까? 믿어지지 않게도 희망 때문이다.”]
자신의 삶이 구멍이 나버렸다고 유족들은 그 삶을 체념하지 않았습니다. 타인의 구멍을 채워주고자 다짐을 하였습니다. 유족들은 슬픔 속에도 다른 이의 슬픔을 보았고, 헤엄치기를 멈추지 않았습니다. 타인의 슬픔을 외면하지 않고, 사랑을 발명하기로 다짐하였습니다.
우리는 그들의 헤엄친 뒷모습을 따라 헤엄치는 삶입니다. 앞으로 가는 그들의 물보라를 보며, 그들이 숨을 쉬고 있음을 목격하고 그들의 휘젓는 팔과 다리의 움직임을 보며 헤엄치는 것을 잊지 않고 조금씩 수면을 향해 갈 수 있습니다.
오늘 나는 헤엄치는 것을 멈추지 않기로 다짐합니다. 거대한 슬픔 속에서 나의 존재는 작고 미약하지만 그럼에도 내가 이곳에 숨 쉬고 있습니다. 내 작은 몸부림이 내 뒤를 따라오는 누군가가 보고 함께 헤엄치기를 간절히 바라봅니다.
꽃들이 피던 날
난 지고 있었지만
꽃은 지고 사라져도
나는 아직 있어
손 흔드는 내가 보이니
웃고 있는 내가 보이니
나는 영원의 날개를 달고
노란 나비가 되었어
다시 봄이 오기 전
약속 하나만 해주겠니
친구야 무너지지 말고 살아내 주렴
-루시드 폴 <아직,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