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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allalawoman Dec 23. 2021

삶은 여행

요르단에서 살고 있는 나는 매우 수동적이고, 정적인 사람이다.

허나, 내가 살아온 시간들은 결코 수동적이고, 정적이지 않았다.


신발이 닳도록 거닐고, 빛을 따라다니고, 단풍에 꽃에 매료되어 길을 거닐었다

책장 넘기는 소리에 취해보고, 낭만 가득한 밤길을 거닐며 나는 세상의 온갖 아름다운 것들을 취하며 살았다.


전 세계를 삼켜버린 전염병으로 여행은 물론 집 밖을 나가는 것마저 허락되지 않은 시간들이 지속되었을 때,  나는 집안의 모든 것들을 취하기 시작했다.

그러지 않으면 안될 것 같았다. 자아를 잃어버릴 것만 같았다. 집 안 구석구석, 식물들의 잎 하나하나, 아이의 표정 하나하나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는 것이 없다.


언젠가 나의 영어선생님이 내게 뜬금없는 질문을 한 적이 있었다.

'갑자기 너의 삶이 힘들어서, 먹고 사는 것도 힘들고, 여행도 할 수 없게 되면 어떨 것 같냐?'고

그때 나는 '여행이야 못 가면 어때, 그게 그리 중요한 일인가?' 반문하였다.


시간이 흘러, 나를 이루고 있던 많은 시간들이 여행으로 채워졌다는 사실을 알았다.

어린 시절, 주말이면 목적지도 없이 아빠 엄마와 떠났던 수많은 여행지들.

그때는 참 피곤하다 생각했는데, 그 시간들이 나의 마음을 만들었고, 나의 생각을 이루었고 나를 빚었다.


차 안에서 엄마와 나누던 수많은 이야기들.

"은주야, 이렇게 쭉 펼쳐진 길을 보면 어떤 생각이 드니? 엄마는 우리의 앞날이 이렇게 펼쳐졌으면 좋겠어"

"은주야, 어서 나와봐 태양이 떠오르고 있어"

어둠을 밀어내며 가장 위대한 존재감을 드러내던 태양을 아직도 나는 생생하게 기억한다.

어릴 적에 우리 아빠는 자동차 뒷편을 침대처럼 만들어, 달리다 멈추는 곳에서 네 가족이 누워 잠을 청하는 여행을 하곤 했다.

나는 계획되지 않고, 준비되지 않은 소박한 여행으로 자라왔다.


어른이 된 후, 고된 일주일을 보내고 얻은 단 하루의 쉬는 날에는 새벽 일찍 가방을 메고 고속터미널 혹은 동서울 터미널로 달려갔다.

매표소 앞에서 지금 당장 갈 수 있는 버스에 몸을 실어 예정되지 않은 여행을 다녔었다.  

주머니가 두둑하지 않아도, 빵과 물 그리고 버스비만 있으면 어디든지 갔다.


일 년을 열심히 모은 돈으로 한 달간 떠난 유럽 배낭여행은 빈곤한 여행자의 표상을 보여주었었다.

식빵 한 봉지와 우유, 그리고 초콜릿으로 끼니를 해결하며 수많은 도시를 걷고 또 걸었다.

내 체구만 한 큰 배낭에 모든 짐을 넣고 두 손이 자유롭게 거닐었다.

몸이 고되었지만 신기한 세상은 온통 게임 속 아이템들 마냥 놓치기 아까운 것들로 가득했다. 풍요롭지 않았지만 나는 세상의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넘어지고, 두려워하며 자유로웠다.


내겐 여행이 내 삶 그 자체였었다.

나는 그걸 몰랐다. 코로나로 잃은 지난 시간 동안 그것이 얼마나 내게 큰 가치였는지를 깨달았다.

집에 머물러야 하는 현실이 숨이 막히고, 나를 무기력하게 하였다.

길을 거닐 때 발끝에 모래가 부딪치는 느낌과 길에서 풍겨나는 수많은 사람들의 냄새와 소리 그 모든 것들이 사무치게 그리웠다.


나이가 들고, 남의 나라에 살다 보니 소심해지고, 두려운 것이 많아진다.

내가 지켜야 할 사람과 소중한 것들이 늘어나기 때문이다.

집 밖을 나설 때도 고민하고, 생각한다.

그런 시간들이 반복되니, 문 밖을 나가는 작은 탐험이 실패하기 일쑤다.


누군가 그랬다. 무기력한 자신을 다시 일으켜 세우는 가장 좋은 방법은 작은 성공을 자주 하는 것이라고.

나는 그 작은 시도를 자주 실패하였다. 내가 어떤 사람이었는지에 대한 기억도 희미해지고 의심하는 순간들이 잦아졌다.

나는 작아졌다. 그럴수록 숨이 막혀왔다. 내 영혼이 작게만 느껴졌다.


"은주야, 세상에 태어났으면 네가 살고 있는 세상이 어떤 곳인지 네가 할 수 있다면 최선을 다해 보려고 노력하렴. 유한한 시간이야. 너에게는 용기가 있단다."

우리 아빠가 내게 해 준 말처럼, 나는 용기가 있는 사람이었다.

아빠의 말씀을 가슴에 새기며 마흔이라는 숫자를 채우며 살아왔다.

나이가 들면서 그 용기가 점점 쪼그라들고, 희미해져간다.

낯선 땅에서 산지 7년이 되었다. 7년이라는 시간동안 나는 언어로 주저 앉고, 낯선 문화에 아직도 적응하지 못하는 소심한 외국인 아줌마가 되었다.

내 모습이 서글퍼 운 적도 많다. 왜 나아지지 않을까를 자책할 때도 많다. 겁도 많아져서 놀라는 일도 어찌나 많은지 참으로 당황스럽다.


어느 날, 내게 시간이 얼마나 남았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심장 두근거렸다.

'이렇게 시간을 흘려보내다 어느 날 갑자기 눈을 감게 되면,

나는 인생이 충분했다 할 것인가, 아님 주저하다 이리될 줄 알았지'라고 후회할 것인가.


신께서 내게 얼마나 시간을 허락하셨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다만, 오늘은 주저하며 살아가기에는 시간이 너무 짧고, 나를 이루어 가는 순간들을 놓치기엔 너무 아까운 것들이 많다는 것이다. 다시 세상 구석구석 들여다보고 싶어졌다.


오늘 아침은 용기 내어 밖으로 나갔다. 혼자 요르단의 작은 미술관을 무작정 찾아갔다.

그 곳에 생각도 못한, 멋진 세상이 나를 기다렸다는 듯 펼쳐지고 있었다. 문밖을 나오면 온통 멋지고, 아름다운 것들이 가득하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다는 듯 나를 제외한 세상은 그렇게 멋지게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 시간안에 다시 걷고 싶어졌다. 당장 먼 곳으로 여행하기는 어렵겠지만, 내가 살고 있는 이 낯선 공간부터 자세히 들여다보고, 걷고 또 걷는 여행을 시작해야겠다는 결심이 가슴 속에서 들끓어 올라왔다.

나는 오늘 아주 잠시 새로운 시간 속으로 여행을 했다. 세포 하나 하나가 다시 살아났다.

낯선 땅에서 낯선 이로 살고 있는 내 삶 자체가 여행이라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 사실을 발견하고 나니, 나는 여행으로 이루어졌던 내 삶을 다시 찾았다.


불꽃이 꺼지기 전에 다시 살아난 의지이다.

여행을 너무도 간절히 원하는 열망이 일으킨 희망이다.

자, 문을 열고 일단 나가자. 나의 용기를 끌어 올려 다시 나가보자.

나는 용기있는 사람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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