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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달리 Sep 21. 2022

황금빛 노을을 만난 것처럼

여행, 날씨 그리고 나의 사람들


첫 직장 동료로 만난 친구들과 오랜 모임을 이어가고 있다. 성격도 성향도 제각각인 우리에게 공통점이 있다면 별난 친구들과의 만남을 기꺼이 따라주는 가족들의 존재와 배려였다. 이 두 가지가 1년 남짓 함께 일한 우리를 지금껏 모이게 한다. 가족이 하나둘씩 늘어가면서 모임 인원도 많아져서 열다섯이 되었다.  달에 한 번씩 모이다가 한동안 만나지 못한 우리는 큰 마음을 먹고 제주로 여행을 떠나기로 했다.


그런데 떠나기 전부터 여행은 순탄하지 않았다. 한 가족이 코로나 확진으로 합류하지 못했고, 나도 발이 온전하지 않았다. 샌들을 신고 살짝 삐끗했는데 병원에 가기는 애매하고 귀찮아서 미루고만 있다가 출발일이 성큼 다가버렸다. 그대로 면 여행 중에 문제가 생기거나 다녀온 뒤 심해질지도 몰랐다. 게다가 강력한 태풍이 예고되어 있었다.


여행하면서 아프지 말고 미리 병원 다녀오라고 동료들이 잔소리 해줘서 겨우 진료를 받았다. 더불어 뉴스를 안 보는 나를 위한 배려 반 놀림 반으로, 태풍 기사를 볼 때마다 소식을 전하며 대신 걱정을 해주었다. 아니나 다를까 여행 전날 밤에는 결항되는 거 아닌가 싶게 비바람이 세차게도 불었다. 지금껏 본 적 없는 역대급 태풍이라는 기사 제목이 과장이 아니었던 걸까?


도착하던 날, 청명한 하늘과 고요한 바다


자고 일어났더니 우려와는 달리 비가 그쳐 있었고, 비행기도 무사히 했다. 에 다다르자 칙칙했던 하늘은 조금씩 구름이 걷히는 중이었다. 택시 기사님 말씀으로는 섬사람들은 일기예보를 믿지 않는, 제주에는 큰 어른이 계셔서 날씨를 관장하기 때문이란다. 한라산을 중심으로 동서남북 날씨가 다 다르니 애월에 비가 오면 서귀포로, 표선에 비가 오거든 함덕으로 피신하면 된다고. 현지인의 말을 듣고 날씨 걱정은 정말 접어 두기로 했다.




친구들과 합류해서 해안 도로를 함께 달리는 중이었다. 창 밖 바다를 보던 만 네 살이 안된 꼬맹이에게 아빠가 “저기 봐, 파도가 부서지는 바위섬이지?”라며 옛날 노래 한 마디를 따와 건넸다. 그러자 맹이서툰 발음으로 똑 부러지게 아빠에게 되묻는다. “아빠, 바다가 뿌샤지는 파도 아니야?” 그렇구나, 그 말도 맞는 말이었다. 른 바다가 하얗게 부서지고 있었다.


노을과 무지개 사이, 북쪽 바다와 하늘


날씨는 예측할 수 없게 변화무쌍했지만 여행 내내 비는 밤에만 내렸고, 폭풍 같던 바람은 어느새 잠잠해지고 햇빛이 쏟아지기를 반복했다. 그러다 바닷가 식당에 자리를 잡은 저녁 식사 시간, 살짝 비를 뿌리다 그친 하늘색이 심상치가 않아 밥을 먹다 말고 몇이 뛰쳐나갔다. 바다가 부서지는 검은 바윗돌 위에 서서  최고로 짙은 금빛 찬란한 노을을 마주했다.


몹시도 황홀했다. 아쉽게도 그 환상적인 광경의 십 분의 일도 사진에 담지 못했다. 을 보면 무지개가 뜬 황금색 하늘이 있었고, 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수평선에 걸친 해가 붉은 기운을 뿜어내고 있었다. 생각이 마비되고 숨은 턱끝까지 차올랐으며 걱정은 모두 도망가 버렸다. 머리칼을 휩쓰는 바람과 강렬한 노을빛이 우리의 몸과 마음 눈부시게 씻겨 주고 있었다.


이튿날 저녁의 길게 누운 노을


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태풍 경고는 계속되었지만 모든 날씨가 우리 편이었다. 때때로 강풍이 몰아쳤지만 세찬 바람마저 두 팔 벌려 환영이었으니 그저 듬뿍 맞이하면 되었고, 할 말을 잃게 만드는 노을도 계속되었으므로 이번 여행은 엄청난 행운이었다. 돌아오는 비행기에서조차 작별의 빛 나를 배웅해주었다. 노을과 구름과 밤의 도시를 한눈에 보는 호사를 누리는 중에 비행기는 밤의 영역으로 그리고 일상으로 진입하고 있었다.


노을과 구름과 야경의 조화로움


멋진 노을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맑은듯 하다가 비비람이 몰아치고 때로는 태풍 같은 흔들림이 찾아오는 삶이지만 늘 내 곁에 있는 가족, 오랜 친구들 그리고 지금의 동료들이 서로를 물들이고 빛나게 한다고. 함께 함으로써 저 아름다운 노을처럼 법 같은 순간을 어낸다고. 만남과 헤어짐이 잦은 직장에서 이런 사람들 만난다는 것은 얼마나 큰 행운인지 모르겠다. 여행은 끝이 났지만 좋은 사람들과의 여정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돌아와서 병원을 다시 찾았다. 진료를 받고 간 덕분인지 발 부상더 심해지지는 않았다. 의사 선생님은 여행지를 묻더니 대뜸 “노을 좋았죠?” 하고 묻는다. 제주에서 4년을 살다 왔다는 선생님은 태풍이 오기 직전에는 바다를 품은 더운 나라에서처럼 노을이 강렬해진다고 설명했다. 그랬구나, 진한 석양 태풍 그렇게 거세게 왔다가 영롱한 색과 빛을 남기고 간 것이었구나. 마음에 새긴 금빛 노을이 다시 가득 올랐다.




Photo by @especial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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