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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달리 Oct 24. 2022

욕망의 시대에 휩쓸린 뒤 남은 것

〈피아니스트의 전설〉을 보고(주요 내용 포함)


아무런 정보 없이 ‘꼭 봐야 하는 영화’라는 한 줄의 추천으로 보게 된 〈피아니스트의 전설〉. 〈시네마 천국〉을 만든 감독의 작품인 것도, 영화 음악을 엔니오 모리꼬네가 만들었다는 것도, 주연 배우의 이름이 팀 로스인 것도 알지 못 채 빠져 버렸다. 영화의 여운에 붙들려 몇 번을 다시 보고, OST를 반복해서 고 있다.


이야기의 화자는 초라한 행색으로 악기점을 방문한 트럼펫 연주자 맥스 튜니. 평생 악사로 살아온 그는 분신과도 같은 악기를 팔아야 하는 처지가 됐다. 마지막 연주를 하던 그는 같은 곡이 녹음된 음반이 있음을 알게 된다. 연주자가 누구인지 궁금해하는 악기상에게 그는 자신의 친구이자 ‘다른 세상에 살았던’ 천재 피아니스트의 이야기를 시작한다.




유럽과 미국을 오가는 호화 유람선에 버려진 아기가 있었다. 20세기의 첫날에 아기를 거둔 인부는 '1900'이라는 상징적인 이름을 지어 주었고, 아기는 석탄고에서 연장과 체인이 흔들리는 소리를 들으며 자란다. '이 배 밖에 있는 건 다 나쁜 것'이라는 양아버지의 말마따나 육지는 그에게 미지의 세계였고, 에게는 태어나고 자라온  고향이 요람이 세상의 전부였다.



8살이 된 그는 출입금지구역인 일등석에서 춤추는 사람들과 신나는 음악을 접하게 된다. 유리 틈으로 바라본 세계는 그가 자란 석탄실과는 전혀 다른 화려하고 이질적인 세계였다. 그리고 이어지는 장면은 불 꺼진 홀, 그랜드 피아노에 앉아 숯검댕 묻은 얼굴 발을 동동거리며 작은 손으로 연주하는 아이의 모습이다. 아름다운 선율에 객실에서 잠자던 손님들은 홀린 듯 몰려와 그의 연주를 감상한다.




피아노 연주에 천재적인 재능을 가진 그는 그렇게 정식 악사가 되고, 맥스도 트럼펫 연주자로 다. 두 인물이 만나 우정이 시작되는 순간은 이 영화의 가장 중요한 장면이다. 잔잔하게 시작되어 점점 현란해지는 〈Magic Waltz〉라는 제목의 음악, 번개 조명과 흔들리는 샹들리에, 천진하고 여유로운 나인틴 헌드레드의 표정까지, 볼수록 설레고 아름다워 보고 또 돌려 보았다. 나는 맥스가 되어 그의 옆에 앉아 환상의 왈츠를 즐겨 보기로 했다.


대단한 폭풍이 치는 밤이었어요. 비바람이 수면을 때리고 천둥번개가 심해까지 찔러대니 바다도 성이 잔뜩 난 거였죠. 검은 파도가 만들어낸 하얀 거품 고래 수십 마리가 배를 집어삼킬 듯 에워쌌어요. 도저히 몸을 가눌 수가 없어서 기어 다니다가 복도 끝까지 미끄러져 처박히고 말았어요. 신사 숙녀들의 구두가 뒹구는 선실에서 난 속을 게워내며 눈물을 쏟고 있었어요.

이 난리통에 멀쩡한 사람이 있다는 게 믿어져요? 말쑥한 차림의 남자가 피아노에 앉더니, 자기를 믿고 피아노의 잠금쇠를 풀라지 뭐예요. 나를 지그시 내려다보는 그의 말을 믿어보기로 했어요. 흔들리는 진동을 몸에 담았다가 손끝으로 발산하듯 그의 손가락이 건반을 때리자 처음 듣는 음률이 나를 휘감았어요. 피아노가 왈츠를 추기 시작하더니 멀미는 온데간데 없어졌죠.

바로 그였어요, 배에서 태어났다는 피아노의 천재가.


그의 즉흥 연주가 시작되면 악단도 연주를 멈췄고 사람들은 그의 손가락 지휘에 맞춰 호흡하고 춤을 추었다. 그는 일등석뿐 아니라 배에 탄 모든 사람들을 위해 연주했다. 이민자들은 젖을 물리고, 면도를 하고, 담배를 피우면서 그의 음악에 빠져들었다.



이처럼 순수하게 음악을 사랑했던 그였지만 세상은 천재적인 명성을 가진 그를 그냥 두지 않았다. 재즈의 대가가 대결을 청해 오고, 음반 제작자들 큰돈을 벌 수 있다며 그를 부추긴다. 그러나 그는 음악으로 경쟁을 해야 하는지 알 수 없었고, 돈을 벌어야  이유를 찾지 못했다.  대결을 펼칠 때 상대방이 연주한 곡은 <The Crave>, '욕망'이었다.




이야기 속 버려진 아기들은 대부분 자신의 뿌리를 알고 싶은 열망을 품고 여행을 떠난다. 그러나 국적도 이름도 생일도, 버려진 이유도 알지 못하는 나인틴 헌드레드는 자신에 대해 궁금한 것이 없다. 바다와 배가 피아노 고정쇠처럼 그를 붙들었고, 피아노가 그의 가족이자 친구고 연인이었기 때문이었다.


단 한 사람, 그의 마음을 흔든 여인이 있었으나 그는 그녀를 따라 배에서 내리는 대신 음악에 사랑하는 마음을 담는다. 그녀는 육지에 속한 사람이기에, 그는 동경하는 그림을 보듯 창문 프레임을 통해 그녀를 바라본다. 그에게 유일한 친구였던 맥스도 마찬가지였다. 고래와 고양이는 평생 함께하는 친구가 될 수 없었던 것일까. 남다른 우정에도 불구하고 삶의 터전과 추구하는 가치가 달랐던 두 사람은 각자 다른 길을 갔다.



영화의 원제는 〈The Legend of 1900〉이다. 그의 천재성에 초점이 맞춰졌다면 영화의 제목은 '1900 of the Legend'가 되어야 했겠지만 '피아니스트(1900)의 전설'인 것은 그가 추구했던 가치와 선택이 위대한 이야기로 남았음을 시사한다. 또한 중의적인 제목은 그의 삶과는 다른 방향으로 흘렀던 시대적 특징을 두드러지게 보여주는 의미를 갖는다.


영화 도입부에는 아메리칸드림을 꿈꾸는 수많은 인파들이 자유의 여신상을 발견한 뒤 흥분하며 열광하는 장면이 있다. 이와는 다르게 배에서 내릴 결심을 한 나인틴 헌드레드는 멈칫하고 만다. 그가 바라본 미국의 도시는 하늘을 찌를 듯 높은 빌딩과 끝을 가늠할 수 없는 세계였다. 무엇을 잃는지도 모르고 왜 원하는지도 모르는 채 욕망에 사로잡힌 세상의 두려움과 허무를 그는 직감했던 것이다.


육지는 내게 너무 큰 배고
내가 연주할 수 없는 음악이야.



1900년의 미국 사회는 도시화와 산업화가 가속화되면서 세계 여러 나라 사람들이 마지막 기회의 땅으로 인식되었다. 회색빛 희뿌연 미국은 과연 그들이 그토록 바란 열망들을 이루도록 해 주었을까? 실상 그 땅은 대부분의 이민자들에게 가혹한 곳이었다. 기회는 모두에게 공평하지 않았고 세계는 화 유람선의 1,2,3등칸처럼 부를 가진 자와 그렇지 못한 자를 철저히 분리시켰다.




흔들리지 않 안정적인 삶을 찾아 떠난 맥스 역시 아무것도 손에 쥐지 못하고 쓸쓸한 노년을 맞이한다. 그에게 남은 것이라고는 아무도 믿어주지 않는 이야기뿐이었다. 결국 악기마저 포기하기로 마음먹었을 때, 유일하게 악기상만이 그에게 이야기를 청한 것이었다. 이야기를 듣고난 뒤 악기상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좋은 이야기는 낡은 트럼펫보다 가치 있지.


자신의 이야기를 믿어주는 사람을 만나고 나야 맥스는 인틴 헌드레드가 했던 말의 의미를 이해하게 된다. '내 얘기를 귀담아 들어줄 친구만 있다면, 인생은 견딜만하다'는 말을. 그리고 일한 친구였던 맥스가 떠난 뒤 혼자 남겨질 것을 알면서도 자신의 세계를 벗어날 수 없었던 나인틴 헌드레드의 두려움과 외로움의 깊이를.



Magic Waltz 연주 장면 (음악 시작 02:40)





Photo : movie.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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