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복처럼 매일같이 걸쳤던 옷들이 문득 칙칙해 보인다면 봄이 오고 있다는 신호다. 미적거리는겨울을 등 떠밀기 위해 봄옷을 사러 백화점에 들렀다. 작정하고 가면 마음에 드는 옷을 발견하기 더 어려운 법이고, 쇼핑이 길어지면 일행도 지치니까 혼자 가는 편이 좋다.
역시나, 매장을 몇 바퀴 돌고 기운이 빠질 때쯤 돼서야 민트색 카디건과 아이보리색 미니스커트를 발견했다.봄코디의 정석과도 같은 조합이 썩 마음에 들어 입어보기로 했다. 전신 거울을 통해 본 모습은직전에 산, 비슷한 색감의 옷들을 환불하는 번거로움을 무릅쓸 만큼마음에 들었다. 허리가 커서 돌아가기 일쑤인 스커트도 내게 맞춘 듯 꼭 맞았다. 다만 무릎 위로 깡충 올라온 길이감에 구매 결정을 못하고 있었다.
30대 이후부터 은근히 올라갔던 몸무게가 재작년 장염과 작년 어지럼증을 앓고 난 후로 이전의 몸무게를 회복했다. 체형도 많이 차이 나지는 않는 것 같은데, 그럼에도 치마 길이는 자꾸만 길어지고 있었다. 기념으로 남겨 둔 미니스커트는 노트 크기만 한 천조각이었다. 한때 그런 걸 어떻게 입고 다녔던 건지 신기할 정도였다.
망설이는 내게 매장 직원분은 칭찬을 적절히 버무린 권유를 건넸고, 짧아서 오래 입을 수 있을까 고민이라고 대답하자 그는 내게 이렇게 말했다. “괜찮은데 왜요? 그런 이유라면 더더욱 입으셔야죠! 망설이면 다시는 못 입는다고요!” 으응, 뭐라고요...?
그 말은 그 어떤 권유보다 강력했고 바로 설득이 되어버렸다. 제대로 영업을 당한 건지도 모르겠지만 옷을 사들고 귀가하는 길에도 그 말이 자꾸 떠올랐다. 그러게, 지금 할 수 있는데 왜 앞날부터 미리 걱정했을까? 그 말 속에 봄내음처럼 발걸음을 가뿐하게 만들 산뜻한 비밀이 숨어있는 것만 같았다.
은은한그 내음을 따라가다 보니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 그리고 그 사이에 가능하지만 시도하지도 않고 포기해 버리는 일이 있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오지 않은 불가능을 미리 걱정하며 지금을 제한하는 일이야말로 낭비일지 모른다. 그러니 미래의 내가 아닌 지금의 나에게 충실해 보자.
이렇게 해서 우리 집 옷장에 자리를 잡은 아이보리색 스커트. 약간의 용기가 필요하지만 색상이 무난해서 어디에도 잘 어울리고, 내게 잘 맞으니 편해서 자주 손이 간다. 마음에 드는 옷을 입은 날에는 기분이 다림질을 한 것처럼 판판해지고 자세까지도 반듯해진다. 봄옷 한 벌로 기분과 자세, 관점마저 달라졌다면 꽤 괜찮은 소비였다고 말해도 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