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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달리 Nov 08. 2022

거친 비유와 거센 말들

뉴스의 언어, 정치의 언어


온라인 기사나 뉴스를 멀리한 지 오래되었다. 자극적인 단어로 전해지는 온갖 나쁜 소식을 들을 마음의 준비가 늘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한 줄의 문장으로 이루어진 기사 제목 거 비유와 표현들이 등장한다. 이 글을 쓰느라 살핀 뉴스 목록에서 본 것은 후폭풍, 반인륜, 점령, 직격탄 같은 단어들이었다. 그곳은 늘 전쟁 중인 것만 같다.


가만히 떠올려 보면 일상의 언어 속에도 전쟁 용어나 폭력적인 언어가 자주 등장다. 총알배송, 폭탄세일, 취향저격, 어깨깡패, 확인사살 등 생각 없이 쓰다가 화들짝 놀라게 되는 그런 말들. 저런 말들이 재치와 재미로 여겨 즐겨 사용하는 말이 되었고 나 또한 가끔은 무심코 사용하기도 했다. 거친 언어를 낳는 것은 험한 세상일까 험악한 사람들일까.


날카로운 비유를 활용한 표현들은 쉽게 이해오래 기억될 수 있지만, 자주 사용함으로써 과장과 과격에 대한 감각이 무뎌지는 것은 우려스럽다. 말로 대화를 할 때에도 텍스트를 주고받 때도 다르지 않다. 누군가 만든 한 용어를 그대로 가져다 쓰면서 참신함은 진부함이 되고, 경험과 감정은 과장되고, 말의 아름다움과 고유함은 사라진다.




이런 고민을 하던 중에 뒤늦게 믿을 수 없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거친 비유였을 어떤 말은 그대로 현실이 되고 말았다. 뉴스를 확인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루 종일 보고 또 보아도 믿기 힘든 일이었다. 뉴스는 그렇게 무섭고 아픈 말들로 뒤덮이고 있었다. 악몽 같은 현실 앞에서 아름다운 말을 고르는 일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고 나의 글쓰기는 한동안 앞 문단에멈춰 있었다.


그러다가 황석희 번역가의 글을 보게 되었다. 책임자들이 유가족들에게 건네야 할 진정한 애도란 위로의 말이 아니라 '납득할 수 있는 종결'이어야 한다는 그의 말에 깊이 공감이 되었다. 어떠한 후속 조치나 처벌도 떠난 이들의 빈자리를 메울 수 없겠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소한의 납득이 아니고서는 상실의 슬픔이 쏟아져내려 삶의 영역을 덮치지 않도록 하는 처마가 되어줄 수 없을 것이다.


그런 그의 견해를 보도하는 기사에서마저 황 번역가가 전하려는 뜻보다 그가 고백한 가족사를 전면에 내세우는 제목들이 보인다. 래 지난 일일지라도, 말의 뜻에어긋남이 없을지라도 통증을 느꼈을 것만 같은 어떤 단어를 마주하고 그가 괜찮을지 걱정부터 되었다.  더 신중할 수는 없었을까, 군가에게 상처가 되지 않을지부터 먼저 고민할 수 없단 말인가.


희생자들을 기리는 장소명과 추모 리본 대한 지침은 더 큰 논란을 일으켰다. 중립적인 용어것은 납득할 수 없는 변명이노골적인 정치 다. 존재를 내세우는 언어보다 존중의 언어를 고를 수는 없을까. 응어리가 치미는 언어 대신 응어리를 치유하는 언어를 기대할 수는 없는 것일까. 세상 여기저기가 무너져 사람들은 멍투성이인데 언어만 고고할 수는 없겠지만, 상처 입어 아픈 이들을 언어가 또  다치게 해서는 안 된다. 래서는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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