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기를 언제부터 좋아했는지 기억은 희미하지만 어려서부터 활자중독이었던 것만은 확실하다. 혼자 화장실을 가면서부터 책이 없으면 안 됐고, 라면을 먹을 때 김치는 없어도 신문 쪼가리라도 있어야 했으니까. 밥 먹을 때 책을 본다고 혼나는 게 일상이었다. 이런 내게 의미 있었던 시절마다의 책을 더듬어 본다.
우리 집엔 없던 디즈니 그림 명작이 있는 이웃집에 가면 놀기보다 책이 먼저였다. 인기 있는 책들은 너덜너덜해져 코팅된 비닐로 간신히 매달려 있던 기억이 난다. 그중에서도 난 스크루지와 데이지가 나오는 《단추로 끓인 수프》를 특히 좋아했다. 커다란 빈 솥에 하찮은 재료를 퐁당퐁당 넣고 휘휘 저어 요리하는 이야기가 왜 그리 재미있던지.
ⓒ 계몽사, 리디북스 어릴 때는 데이지의 재치에 신나고 욕심쟁이 스크루지가 속아 넘어가는 게 통쾌했을 것이다. 스크루지가 데이지의 혼잣말에 꽁꽁 숨겨놓은 재료를 하나씩 공개하는 재미가 있었다. 이 이야기가 지금까지도 좋은 이유를 생각해봤다. 데이지의 부드러운 설득 방식이 좋고, 속는 줄 모르고 좋은 일을 하는 스크루지가 밉지 않고, 충돌 없이 나눔이 실현되는 광경이 좋은 것이었다.
6학년 개학을 앞둔 어느 겨울, 내 방에서 불이 났다. 그날 새벽 매캐한 냄새에 동생을 깨워 다른 방에서 자느라 화를 피한 나는 방이 없어진 건 모르겠고 새 책이 탔다는 충격에 주저앉아 울고 말았다. 엄마가 아무리 괜찮다고 달래도 서럽게도 울었단다. 그때 내게 학교와 책은 타협할 수 없는 절대적인 대상이었으니까.
다음으로 기억나는 책은 아빠가 사준 주니어 추리 명작선 중 《도노반의 뇌》라는 소설이다. 그땐 도서관에 가려면 버스를 타야 했고, 동네 대여점에는 시시한 책뿐이었다. 그래서 집에 있는 책들을 네 번씩은 읽었는데, 특히 이 책이 인상적인 이유는 지금 읽어도 뒤지지 않을 스토리 때문이다. 사고로 육체가 소멸한 사람의 뇌에 전기 공급을 해서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고, 타자의 육체까지 지배하게 된다는 공상과학 소설이었다. 이 이야기를 반복해서 읽으면서 어린 나이에 육체와 정신의 한계에 대해 아주 잠깐 고민해볼 수 있었다.
집에서 한 시간 거리의 대학에 버스로 통학하면서부터는 차 안에서 뭐라도 읽어야 했다. 멀미가 심했지만 차에서 책 읽는 요령을 터득하고야 말았다. 주행할 때 책을 보다가 차가 정지하려는 순간에 고개를 들어 정면을 보면 된다. 피겨 선수가 스핀을 돌면서 어지럽지 않을 수 있는 요령과 비슷하달까. 아무튼 당시에는 《양을 쫓는 모험》을 시작으로 《노르웨이의 숲》, 《1973년의 핀볼》, 《태엽 감는 새》, 《렉싱턴의 유령》과 《TV 피플》 등 무라카미 하루키 작품을 섭렵했다. 이때부터 몰아읽기와 연계독서 습관이 시작되었다.
20대를 그렇게 보내고 30대부터는 독서기록을 데이터로 남기기 시작했다. 기록을 살펴보면 첫 해에 10권으로 시작한 기록이 최근에는 120권이 되었다. 양적 성장뿐만은 아니었다. 책을 좋아하는 깊이도 어느 정도 생겼다. 이 목록 중에서 다시 읽지 않을 수 없는 책은 한 해에 열 권 남짓이다. 그런 책들을 다시 보면서 달라진 나를 만나는 것은 특별한 즐거움이다. 이 시기에 의미 있는 책들은 모두 소개할 작정이니 앞으로도 꾸준히 읽고 쓸 일만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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