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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달리 May 06. 2022

여고생의 첫 장편소설과 이상형의 발견


고등학생 때는 집 근처에 작은 도서관이 없어서 주말에 버스를 타고 규모가 큰 시립도서관 다녔다. 식권을 사서 구내식당에서 줄을 서서 밥을 먹으며 대학생 흉내를 낼 수 있는 곳이었다. 그러자니 시험에 나오는 문학 말고 대학생들이 읽을 법한 책을 읽고 싶었다. 그래서 고른 책이 《빙점》과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었다.




미우라 아야코의 《빙점》은 어려움 없는 여고생이 이해하기에 너무 많은 것을 담고 있는 이야기였다. 역경을 이겨낸 선한 주인공의 이름보다 계모 ‘나쓰에’의 이름 아직껏 기억하고 있는 걸 보면, 복수 심리와 인간의 이중성, 아이에게마저 냉담한 세상이 꽤 섬뜩했던가 보다. 소설의 내용과는 별개로, 전래동화부터 이 책에 이르기까지 계모라는 존재 악의 상징이 된 것은 왜일까 궁금했다. 왜 나쁜 계부 이야기는 거의 없을까.(쓰에는 엄밀히 말하면 ‘양모’이지만)



계부보다 계모가 흔하고, 계모가 악한 역할을 맡게 된 이유는 이야기에서나 현실에서나 그동안 남성의 재혼이 여성의 경우보다 흔했고, 그로 인해 문제가 발생하는 경우도 많았기 때문일 것이다. 여성의 재혼은 금기와 같았다. 이런 사회적인 제약이 배제된 채 이야기에서 흔히 만나는 계모들의 이미지가 부정적인 것은 부당하고 억울한 일이다. 게다가 최근에 놀라운 발견이 있었다. ‘계모’라는 단어를 ‘계략’할 때의 '셈할 계(計)' 정도로 짐작하고 있었는데 '이을 계(繼)'였던 것이다. 세상의 모든 새엄마들과 아이들이 이런 편견으로 얼마나 힘들었을지 생각하니 마음이  않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는 말도 못 하게 좋아서 네 번을 읽었다. 주인공이 제멋대로이지만 강인한 여성이라는 점도 좋았고, 그를 지탱하는 것이 남자도 부도 아닌 땅이라는 것이 캐릭터를 특별하게 만들었다. ‘타라’라는 남의 땅 이름이 그렇게 친근할 수가 없었다. 대책 없고 이기적이지만 미워할 수도 없는 스칼렛 오하라를 거의 완벽하게 연기한 비비안 리의  이미지도 영향 컸다.


ⓒ movie.daum.net

그를 이해할 수 없었던 한 가지는 답답하게도 레트 버틀러를 놓친 이다. 레트는 작고 여린 여고생의 마음에 장작불을 놓았다. 악명 높은 명성 능력에 반하는 예의바름, 시기적절하 단도직입적인 언행과 냉철한 통찰력, 길쭉길쭉한 팔다리와 정갈하면서 세련된 정장, 매력을 넘어 마력적인 콧수염이 장착된 미소까지. 흰머리가 성성하거나 말거나 그는 나의 완벽한 이상형이었다. 모두가 무시했던 창부 벨을 배려하는 태도나 제멋대로인 스칼렛 오하라를 다루는 솜씨도 그를 돋보이게 했다. 자신과 견해가 다른 이들을 돕는 그는 진정한 신사고, 그를 향한  아궁이는 여전히 타오르고 있다.


이 소설이 좋았던 나머지 남북전쟁을 다룬 이 이야기에서 남부인에게 감정이입을 하는 나를 보았다. 역사적인 문제를 잘 알지 못했을 때 읽은 책이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 책의 영향력이 크다는 걸 실감했다. 시간이 더 지나 남북전쟁이 단지 노예 제도에 대한 입장차만이 아니라 여러 정치적 이해관계가 얽혀 있다는 걸 알게 될 때까지 어느 정도 마음의 불편함이 남아 있었다. 사회윤리의 기준이 바뀔 때마다 책의 가치와 평가도 달라진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은 나보다 세 살 많은 사촌 언니를 통해 접했다. 이 책은 여고생이 느끼기에 본격 성인 소설이었다. 네 사람의 관계도 복잡하고 ‘영원 회귀’라는 말이 어려워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베토벤의 운명이 배경으로 깔리며 ‘그럴 수밖에!’라는 말이 강렬히 남아 있을 뿐이다. 10년마다 한 번씩 읽었으니 다시 읽을 시기가 다가온다.


책 이야기를 쓰다 보니 오래전에 잊은 줄 알았던 생각의 조각들이 고개를 내민다. 그때 그 설렜던 감성들도 되살아난다. 독후감과 일기를 간단히 메모했던 다이어리, 거기에 적어두었던 글귀도 얼마쯤 떠오르는 걸 보면 읽기와 쓰기는 참 힘이 세고 오래 지속된다. 몇십 년 전에 읽은 책을 이렇게 리뷰할 줄은 정말이지 몰랐다.



Photo : pixaba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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