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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달리 May 07. 2022

헤르만 헤세가 사랑한 책과 서가

《헤세의 문장론》을 읽고


《데미안》을 시작으로  《크눌프》, 《싯다르타》, 《유리알 유희》, 《나르치스와 골드문트》를 읽었다. 그리고 《헤세의 문장론》에 이르렀다. 그의 소설은 대립하는 두 세계에서 자신의 길을 찾아 나선 성장 이야기였다. 청소년기에 신학과 문학 사이에서 갈등하며 자살을 기도한 경험이 있어서일까. 모두가 그 자신의 이야기인 듯싶었고 《나르치스와 골드문트》에서 찾은 문장도 이를 뒷받침했다.


인생을 대가로 지불하지 않는 창작,
창조의 숭고함을 포기하지 않아도 되는 인생,
그것은 정말 불가능한 것일까?


옮긴이 홍성광에 따르면 헤세가 젊은 시절에 사랑했던 문장은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일부 인용한 “나는 모든 글 중에서 자신의 피로 쓴 글을 가장 많이 사랑한다”였다고 한다. 그에게 글쓰기란 한때 삶을 송두리째 내어주어야만 가능했던 것이어서 신경증까지 겪었던 것일까.




《헤세의 문장론》은 그의 나이 33세부터 생을 마감하기 전까지 책과 글쓰기에 대해 쓴 에세이 모음집이다. 에세이를 통해 만난 헤르만 헤세는 작가라는 직업에 있어서 고독한 예술가라기보다는 냉철한 비평가의 인상이다. 한편 책에 대해서는 열렬한 애정을 보이는 진지하고도 섬세한 애호가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시대를 막론하고 기성세대가 젊은이에게 ‘요즘 사람들’이라고 한탄하는 만큼이나 독서도 걱정거리였던듯, 헤세는 책을 읽지 않는 대중을 질책하고 인기 있는 책만 읽는 세태를 꼬집는다. 외판원의 꼬임에 넘어가 거금을 들여 장정을 사놓고 읽지 않는다고 타박하고, 책은 여유 있게 진심을 담아 읽어야 하며, 대충 읽는 것은 의미 없이 뇌를 지치게 하는 쓸데없는 일이라고 따끔하게 꾸짖는다.


인생은 짧다. 저승에서는 몇 권의 책을 읽었는지 묻지 않는다. 그러므로 무가치한 독서로 시간을 보내는 것은 어리석고 해로운 일이다. 내가 이때 염두에 두는 것은 나쁜 책이 아니라 무엇보다도 독서의 질 자체이다.
우리는 냉담한 선생님에게 다가가는 소심한 학생이나 술병에 다가가는 건달처럼 할 것이 아니라, 알프스에 오르는 등산객처럼, 무기고로 들어가는 전사처럼 책에 다가가야 한다.


반면, 그가 얼마나 책을 좋아했는지는 책을 소유하고 관리하는 것을 ‘책과의 교제’라고 표현할 만큼 절절하다. 직접 제본하여 책에 개성을 부여하는 방법, 책을 정리하는 방법마다의 즐거움, 먼지 없이 책을 보관하는 방법까지 시시콜콜하다. 그에게 책은 ‘재료의 측면에서 볼 때’ 가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정신에 의해 고상해진 질료의 한 조각'이고, '기적’이자 ‘성물’이다.


그렇기에 남들이 정해주는 추천도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으며, 친구를 사귀는 것처럼 자신에게 꼭 맞는 책을 찾아 자신만의 서가를 마련하기를 권유한다. 서가에도 한계가 있으므로 그는 꼭 필요한 책인지, 다시 읽을 책인지, 분실하면 마음이 아플 것인지를 따져 책을 정리했다. 그의 조언에 따라 나도 세 번 이상 읽을 책들만 소장하고 있다. 내 책장에 많은 책들이 들락날락하다가 도저히 정리할 수 없는 책들로 채워질 날을 상상하면 벌써부터 벅찬 기분이다.


처음에는 이 세계가 튤립 화단과 금붕어 연못이 딸린 작고 귀여운 유치원인 줄 알았다. 그런데 그 정원이 공원이 되고 풍경이 되고 대륙이 되고 세계가 되고 낙원이 되며 (...) 온갖 민족과 시대의 정신이 깃든 수천 개의 홀과 뜰이 있는 신전으로 생각된다.



알려진 것처럼 그가 심리학에 심취했던 것만은 아니었다. 프로이트와 융의 심리학이 예술과 생산적인 만남을 했다는 것은 인정했으나, 그가 작가로서 예감한 것들이 무의식에서 진술되고 있었음을 확인한 것이었다. 그는 정신분석이 자신에 대해 진실을 요구하는 것이라는 본질을 꿰뚫어 보았고, 심리학의 등장 이전이나 이후에도 '정신의 문제를 문학적으로 파악하는 일은 분석이 아닌 직관적 재능'이 해야 할 일이라고 판단했다.


문학의 대가이자 책을 향한 무한한 애정 글로 남긴 헤세도 왜 책을 읽고, 쓰고, 서재에서 기쁨을 얻는 것인지 묻고 또 묻는다.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읽기와 쓰기가 어떤 가치를 갖는지 혼란스러웠을 것이다. 그 시대의 문인들 중에는 전쟁을 찬양하고 선동하는 이들도 많았으므로. 그럼에도 그는 결국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린다.


그들이 파괴한다면 나는 건설한다.
그들이 흩트린다면 나는 주워 모은다.




책 정보 : 《헤세의 문장론》 헤르만 헤세, 홍성광 편역, 연암서가 펴냄

Cover Photo : pixaba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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