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 불안장애를 완치한 이야기

여행과 대리기사 일을 하며 스스로 불안장애를 완치하게 되다.

by 용진캠프

여행을 이어나가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했기에 이런저런 아르바이트 일을 찾아서 하게 됐다. 몇 주간은 1톤 트럭을 타고 전국의 중학교, 고등학교를 돌며 각 반에 학습지와 전단지를 날라주는 일을 했다. 무거운 물건을 옮겨야 했지만 아르바이트 일당 외에 밥값이 따로 나왔고 모텔 숙박도 제공되었다. 여행 경비를 아끼려고 밤이 되면 PC방에 들어가 쪽잠을 청하며 여행을 이어오던 차에 모처럼 침대에서 잠다운 잠을 잘 수 있었다. 같이 일하던 세 명이 모텔 방 하나를 함께 써서 비좁기도 했고 동료의 코 고는 소리가 들려 신경 쓰이기도 했지만 오랜만에 단잠을 잘 수 있었다. 그렇게 편하게 잠잘 수 있는 시간이 정말 행복했는데, 평소에 좋은 침대에서 잠을 자고 있었다면 그때 그 행복감을 느낄 수 있었을까? 우리네 인생은 PC방 쪽잠 같은 불편함을 겪고 나서야 비로소 평범함이 가져다주는 소소한 행복을 온전히 느끼게 된다. 다음 날 아침 일찍 일어나 동료들과 1톤 트럭에 실린 학습지와 전단지를 나눠주러 주변 고등학교로 향했다. 낯선 이방인인 우리를 쳐다보는 학생들의 시선이 느껴졌다. 당시에는 비슷한 나이대의 친구들이었기에 얼굴이 여간 화끈거려오는 게 아니었다. 무거운 학습지, 전단지 꾸러미를 각반 교실을 돌며 나르자 땀이 흥건해졌다. 복도를 걷다가 문득 교실 밖으로 들려오는 학생들의 왁자지껄 소리가 부러워졌다. 학교로 등교해 미래를 꿈꾸며 공부하고 있는 그들의 모습은 불과 몇 해 전 나의 모습이기도 했다. 그때가 어찌 보면 좋은 시절이었다는 걸 깨달았다. 시간의 흐름 속에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은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었다. 일상에 대해서 당연하게 생각하지 말고 매사에 감사할 수 있는 마음을 가져야겠다고 다짐했다.


국토순례 여행을 통해 많은 일들을 겪으며 인생에 대한 깨달음을 얻어가고 있었지만 불안장애는 사라지지 않았다. 강박증, 우울증, 공황장애 모두 번갈아가며 내 사유의 자유를 속박했다. 특히 지그문트 프로이트라는 심리학계의 거장은 계속해서 내 어깨를 짓누르고 있었다. 그가 ‘정신분석의 이해’에서 언급했던 바대로 불안장애가 의식 밖의 영역에 의해 발현된 것이라면 아무리 의식적인 깨달음이 있더라도 이 불안장애는 고쳐질 수 없는 거였다. 이게 당시 나에게 매우 중요한 문제였던 이유는 몇 해 전 중학교 3학년 겨울 방학 때, 웨인 다이어 박사의 ‘네 마음을 바꾸면 인생이 달라진다.’라는 책을 통한 의식적 각성으로 불안장애를 오랜 시간 떨쳐버렸던 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덕분에 고등학교 초중반 시절 마치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 학업을 포함한 모든 부분에서 완전히 기능할 수 있었다. 항상 이때를 그리며 다시 스스로를 통찰해 불안장애를 완전히 떨쳐내고 싶었기에 심리학 서적들을 찾아 읽고 있었던 거였다. 그렇기에 인지적 교정으로 어찌할 수 없는 무의식 영역이 존재한다는 그의 이론을 접하자 엄청난 두려움이 몰려왔다. 그의 의견에 따르면 내 스스로 치유할 수 있기보다는 심리 전문가를 만나 최면 요법으로 무의식을 전문적으로 만져줘야만 불안장애가 해결될 것 같았다. 하지만 그 비용이 너무 비싸서 제대로 시작해볼 엄두조차 나지 않았다. 상담 중 한 전문가는 불안장애가 만약 전문적 과정을 거치지 않고 일시적으로 고쳐진다면 더 심한 정신적 문제가 생길 거라는 식으로 얘기하기도 했다. 과거에 책 한 권을 통해 불안장애를 극복했던 경험이 있던 나였기에 무엇인가가 무의식 영역에서부터 잘못될 것만 같은 불안감에 사로 잡혔다. 당시에는 많은 전문가들이 무의식에 관련한 그의 이론을 추종하고 있었다. 그리고 인지적으로 충분히 심리 상태를 개선할 수 있다고 외쳤던 웨인 다이어 박사보다는 훨씬 더 국제적인 명성을 쌓고 있는 사람이기도 했다. 취약했던 심리 상태가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권위에 눌려 무의식 영역의 존재를 간과할 수 없다는 불안감 속에 더욱 흔들렸다. 결국 심리 전문가에게 맡길 돈이 없으면 불안장애는 평생 안고 갈 수밖에 없는 십자가가 될 거라는 막연한 두려움이 엄습했다. 이 생각은 무력감 속에 공포심마저 느끼게 만들었다. 일말의 희망도 막혀버린 고착 상태가 되어 너무나도 괴로웠다. 결국 자살을 기도하기도 했다. 국토순례 말미에 이 모든 극한의 심리적 고통 속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에 차가운 동해바다로 몸을 던졌다. 바닷물 속에서 허우적대고 있을 때 어떤 손에 의해 건져졌다. 혼미해졌던 정신이 돌아왔을 때는 기진맥진한 채로 뭍에서 숨을 거칠게 몰아쉬고 있었다. 삶과 죽음의 문턱에서 이렇게 숨을 쉬고 있다는 자체만으로도 얼마나 큰 축복인지 알게 됐다. 죽음에 다가가자 불안장애로 인한 괴로움조차 그저 사치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두운 장막을 걷고 나와 환하게 빛나는 바다를 바라보며 다짐했다.

“그래 이왕 이렇게 덤으로 살게 된 인생 내 인생을 통해 영화 한 편 써보자.”


국토순례를 마치고 집에서 멀지 않았던 교보문고에 살다시피 했다. 주로 심리학 분야의 서적을 읽었지만, 해외여행 관련 서적들도 함께 다독하게 되었다. 그때부터인가 이역만리 미지의 세계를 경험해 보고 싶었다. 하지만 당시 우리 집의 경제적 사정은 크게 나아지지 않았다. 허름한 빌라 1층에 세 들어 살고 있었으며, 부모님은 그 보증금마저 빚져서 마련했다. 그 경제적 비극은 초등학교 학생들을 가르치던 순진한 부모님께 사기꾼이 접근해 오면서 시작됐다. 그 사기꾼에게 1억이 넘는 거금을 뜯긴 후, 이를 만회하기 위해 울분에 차서 집까지 팔아 주식하다가 꼬라박고, 빚까지 져서 또 꼬라박고를 반복했다. 당시 집에서 빚으로 나가는 이자만 해도 월 몇 백만 원이니 이 돈을 갚기도 벅찬 부모님에게 손을 빌리는 건 말도 안 됐다. 가고 싶던 여행은커녕 당장 성인으로서 살아갈 돈이 필요해 대리기사 일을 시작했다. 종종 미약하게나마 찾아오는 불안장애의 뿌리를 뽑아 버리기 위해 교보문고에서 심리학 관련 서적을 탐독하며 낮 시간을 보냈다면, 밤에는 대리기사가 되어 여러 대리 고객들의 살아가는 다양한 이야기를 들었다. 대리 고객님들은 술이 알딸딸하게 취해 계신 데다 그들의 제 2의 집이라고 할 수 있는 자가용 안의 안락함 때문인지 낯선 대리기사에게 마음 안에 담고 있던 당신들의 인생관을 술술 풀어놓으셨다. 그들의 생동감 있는 인생 경험담 속에서 많은 것들을 배울 수 있었다. 그 공간은 그렇게 대리기사로 밤을 달리던 나에게 살아 숨 쉬는 교육의 장이 되어갔다. 대리기사로 돈을 벌 수 있었던 데다가 다양한 인생 선배들의 삶이 만들어준 깨달음까지 얻어갈 수 있으니 정말 보람 있는 직업이었다. 이 일 덕분에 마음을 울리는 사람들을 많이 만났다. 이들은 좋은 인연이 되어 나중에 술 한 잔 기울이며 인생을 논하는 친구가 되기도 했다. 그들과 소통하며 불안장애는 점차 꽤 많이 누그러들고 있었다.


그러다가 군대를 가게 되었다. 누가 군대는 인생의 낭비라고 하지 않던가. 하지만 나에게 군대는 내가 그토록 고민하던, 내 인생을 낭비하게 만든, ‘프로이트 표 무의식’이라는 암초를 완전히 제거하는 계기가 되었다. 내가 있던 부대의 특성상 전국 각지에서 다양한 사람들이 모였다. 덕분에 여러 부류의 사람들과 사귀게 되었다. 어느 날 두 후임이 동일한 일을 내게 완전히 다르게 보고하는 거다. 나중에 자초지종을 들어보니 바라보는 시각에 따라 두 보고 모두 맞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들은 누구나 그렇게 자신이 살아온 각자의 환경에 의해 형성된 자신만의 세계관으로 현상을 가공해서 받아들이고 있었다. 같은 사실인데도 불구하고 스스로 형성한 개별화된 믿음 체계에 따라 전혀 다른 방향으로 인지하는 거다. 이 같은 사실을 깨닫자 그때까지 강박적으로 머릿속에 맴돌았던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성적 무의식을 더 이상 애써 부정할 필요조차 없었다. 인간이 의식적으로 어쩔 수 없는 성적 무의식이 존재한다는 건 단지 그의 생각이었다. 그가 자신의 어머니와 나이 차이가 얼마 나지 않는 상태에서 새아버지를 맞이하게 된 그만의 불안한 환경이 빚어낸, 그만의 세계관이 만들어낸 이론에 불과했다. 그렇기에 프로이트의 제자 칼 융과 에리히 프롬은 프로이트의 이론을 신랄하게 비판했고, 행동주의 학파의 대표자인 스키너는 프로이트의 무의식이 증명 불가능한 것이라고 인정조차 하지 않았던 거였다. 그래, 모두 자신의 고유한 믿음 체계 안에서 현실을 재창조하여 받아들이고 있다. 아무리 권위 있는 사람의 말이라도 불변의 진리로 봐서는 절대 안 된다. 환경과 시대에 따라 변화할 수 있는 이론에 불과하기에 당신의 인생에 독소가 된다고 판단이 선다면 결코 휘둘려서는 안 된다. 의식의 무한한 가능성을 주장했던 웨인 다이어 박사가 정신적으로 괴로웠던 학창 시절의 나를 긍정적인 방향으로 바꿔놓았다면, 그의 철학을 계속 삶에 접목시키면 그걸로 되는 거다. 그와 배치된 심리학 이론을 펼쳤던 지그문트 프로이트가 심리학 분야에서 더 권위 있다고 해서 그의 생각이 더 가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나는 고유한 나이기에 그가 심리학계에 뿌리 심어놓은 무의식이라는 개념에 영향 받을 필요가 없다. 만약 당신이 정신분석학파 심리상담 전문가에게 오랜 시간 동안 비싼 돈을 내며 치료받는 걸 선호한다면 그렇게 하면 된다. 아마 그 심리상담 전문가는 이미 지나간 당신의 과거 기억의 파편을 들춰낼 거다. 그렇게 하며 무의식을 의식화시키는 작업을 할 건데, 나로서는 오히려 스스로 할 수 있는 건 없다는 무력함 속에 극심한 불안감만 가중되었다. 이건 내 경험 자산이 만든 확신인데 불안장애는 의식적으로 충분히 극복할 수 있다. 오늘도 난 그렇게 인간 의식의 무한한 가능성을 내 삶 속에서 실천하고 있다.



※ 다음 챕터에 계속 이어 나가겠습니다.


카카오 브런치 작가이자 여행 유튜버 세계일주 용진캠프는
현재까지 6대륙 101개국 세계여행 중입니다.


출판 및 강연 문의 : especialone@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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