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한국인으로 인종차별 당하게 될 때 그냥 도망가기보다 맞서는가?
누가 군대는 인생의 낭비라고 하지 않던가. 하지만 나에게 군대는 내가 그토록 고민하던, 내 인생을 낭비하게 만든, ‘프로이트 표 무의식’이라는 암초를 완전히 제거하는 계기가 되었다. 내가 있던 부대의 특성상 전국 각지에서 다양한 사람들이 모였다. 덕분에 여러 부류의 사람들과 사귀게 되었다. 어느 날 두 후임이 동일한 일을 내게 완전히 다르게 보고하는 거다. 나중에 자초지종을 들어보니 바라보는 시각에 따라 두 보고 모두 맞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들은 누구나 그렇게 자신이 살아온 각자의 환경에 의해 형성된 자신만의 세계관으로 현상을 가공해서 받아들이고 있었다. 같은 사실인데도 불구하고 스스로 형성한 개별화된 믿음 체계에 따라 전혀 다른 방향으로 인지하는 거다. 이 같은 사실을 깨닫자 그때까지 강박적으로 머릿속에 맴돌았던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성적 무의식을 더 이상 애써 부정할 필요조차 없었다. 인간이 의식적으로 어쩔 수 없는 성적 무의식이 존재한다는 건 단지 그의 생각이었다. 그가 자신의 어머니와 나이 차이가 얼마 나지 않는 상태에서 새아버지를 맞이하게 된 그만의 불안한 환경이 빚어낸, 그만의 세계관이 만들어낸 이론에 불과했다. 그렇기에 프로이트의 제자 칼 융과 에리히 프롬은 프로이트의 이론을 신랄하게 비판했고, 행동주의 학파의 대표자인 스키너는 프로이트의 무의식이 증명 불가능한 것이라고 인정조차 하지 않았던 거였다. 그래, 모두 자신의 고유한 믿음 체계 안에서 현실을 재창조하여 받아들이고 있다. 아무리 권위 있는 사람의 말이라도 불변의 진리로 봐서는 절대 안 된다. 환경과 시대에 따라 변화할 수 있는 이론에 불과하기에 당신의 인생에 독소가 된다고 판단이 선다면 결코 휘둘려서는 안 된다. 의식의 무한한 가능성을 주장했던 웨인 다이어 박사가 정신적으로 괴로웠던 학창 시절의 나를 긍정적인 방향으로 바꿔놓았다면, 그의 철학을 계속 삶에 접목시키면 그걸로 되는 거다. 그와 배치된 심리학 이론을 펼쳤던 지그문트 프로이트가 심리학 분야에서 더 권위 있다고 해서 그의 생각이 더 가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나는 고유한 나이기에 그가 심리학계에 뿌리 심어놓은 무의식이라는 개념에 영향 받을 필요가 없다. 만약 당신이 정신분석학파 심리상담 전문가에게 오랜 시간 동안 비싼 돈을 내며 치료받는 걸 선호한다면 그렇게 하면 된다. 아마 그 심리상담 전문가는 이미 지나간 당신의 과거 기억의 파편을 들춰낼 거다. 그렇게 하며 무의식을 의식화시키는 작업을 할 건데, 나로서는 오히려 스스로 할 수 있는 건 없다는 무력함 속에 극심한 불안감만 가중되었다. 이건 내 경험 자산이 만든 확신인데 불안장애는 의식적으로 충분히 극복할 수 있다. 오늘도 난 그렇게 인간 의식의 무한한 가능성을 내 삶 속에서 실천하고 있다.
군대 전역 후 대입 수학능력시험 공부를 다시 시작했다. 스스로 불안장애를 해결하기 위해 독학으로 시작했던 심리학 공부도 틈틈이 함께 했는데, 개개인의 각기 다른 환경에 의해 형성된 인지 체계에 의해 사실을 다르게 판단할 수 있다는 ‘믿음 체계 이론’을 구체화시켜보고 있었다. 그리고 이를 교육 분야에 접목시켜보고 싶어졌다. 심리학 이론이 융합된 교육으로 누군가의 삶을 긍정적인 방향으로 변화시킬 수 있다면 보람될 것 같았다. 적어도 내가 겪은 심리적 고통과 시행착오를 겪는 인생 후배가 더 이상 없었으면 했다. 자연스럽게 교육학과 심리학을 모두 기본 교양으로 수학할 수 있는 서울교육대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다. 교대 특성상 전공은 초등학교 과목 중 선택해야 했기에 영어교육학을 선택했다. 당시 전국에는 영어 교육 열풍이 불고 있었다. 나 역시 TED를 보면서 훗날 세계 곳곳의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줄 수 있는 영어 연설을 하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실용 영어에 능통해야 했다. 하지만 막상 대학교를 입학해 배우게 된 영어는 문법과 영어 교수법에 치중되어 있었다. 영어회화 실력을 키우기 위해서는 외국 친구들과 대화할 수 있는 기회를 조금이라도 더 많이 가지는 게 나아 보였다. 그래서 일부러 거리에서 외국인을 보면 말을 붙여보곤 했다.
‘해외로 여행을 떠난다면 영어로 소통할 기회가 더 많아질 텐데’
이 생각과 함께 국토순례를 통해 새로운 환경을 경험하며 정신적으로 얼마나 크게 성장할 수 있었던가가 떠올랐다. 한국과는 다른 새로운 세계로 여행을 떠날 수 있다면 인생에 대해 더 많은 고찰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서울교육대학교에 입학하기 전부터 오랫동안 서초동의 무지개 독서실이란 곳에서 총무 일을 하고 있었는데, 아르바이트 월급에서 생활비를 제외한 돈을 미래를 위해 차곡차곡 저축해두고 있었다. 일전에 하역일, 예식장일, 대리기사일, 군복무를 하며 모아둔 돈과 합쳐보니 장기간 어디든지 훌쩍 떠날 수 있었다. 덕분에 서울교육대학교 1학년 여름방학 때, 처음으로 해외여행을 떠났다. 영국 런던 인, 프랑스 파리 아웃의 50일가량의 일정이었는데 유럽을 크게 시계 방향으로 돌았다. 그 길지 않은 시간 동안 벨기에, 네덜란드, 독일, 체코, 헝가리, 오스트리아, 리히텐슈타인, 이탈리아, 산마리노, 바티칸시국, 스위스, 안도라, 스페인, 모나코 등 정말 많은 나라를 여행했다. 옹기종기 여러 나라가 모여 있는 유럽 대륙은 나라마다 개성이 뚜렷했기에 계속 이동하며 새로운 환경을 경험할 수 있었다. 유럽에는 지정된 기간 동안 여러 회사의 기차를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는 유레일 패스가 있는데, 만 27세 전까지는 유레일 패스를 35퍼센트나 할인해서 구매할 수 있다. 덕분에 저렴하게 이곳저곳을 이동할 수 있었다. 간혹 유레일 패스로 갈 수 없는 구간들도 있었기에 이 경우 따로 지역 구간 기차나 버스를 이용해 이동했다. 어떤 나라에서는 하루만 있기도 했고 어떤 나라에서는 5일 밤 이상을 지내기도 했다. 대학생 신분에 여행경비를 아끼기 위해 종종 노숙을 하기도 했고 숙소를 잡게 되면 한인 민박이나 호스텔을 주로 이용했다. 평소에 여행 관련 서적을 읽어오긴 했지만 실전에 들어가 보니 모든 과정들이 낯설고 실수투성이였다. 하지만 손짓 발짓하며 난생처음 만난 외국 친구들과 어떻게든 대화해보는 게 무척 재밌었다. 한국에서 볼 기회가 없던 이국적인 경치들에 몇 번이고 감탄사를 연발했는지 모른다. 고풍스러운 유럽 건물들의 모습, 아름답게 펼쳐진 자연경관들이 눈을 통해 가슴 속 한가득 담겨 갔다. 세상이라는 편지는 정말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렇게 마음의 가지는 무럭무럭 더 넓은 세계를 향해 자라고 있었다.
영국 런던은 비가 추적추적 내리기 일 수였다. 한국과 달리 우산도 없이 비 맞으며 걸어가는 영국인들의 모습이 낯설게 느껴졌다. “존, 너희가 우산 안 쓰고 다니는 건 자주 내리는 비에 익숙해져서 그런 거야?” “그런가? 그것보다 대부분 이슬비로 내려서 맞아도 옷이 별로 젖지 않아서 그럴 거야. 그리고 여긴 비가 깨끗한 편이거든.” 존은 런던의 한 호스텔 도미토리에서 함께 지내던 친구였다. 북아일랜드에서 왔는데, 내가 호스텔로 오기 전부터 6인실 방의 2층 침대 한 칸을 차지하고 있었다. 이 친구 말에 의하면 영국은 비가 워낙 자주 내려서 오히려 하늘에 먼지도 없고 빗방울 역시 깨끗하단 거였다. 이게 과학적으로 맞는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일리가 있겠다 싶었다. 뭐든 자주 씻을수록 깨끗해지는 법이니까. 런던 거리를 적시는 시원한 비를 바라보며 마음 안의 번뇌도 이 빗물에 씻겨 내려가길 원했다. 이곳에 머물던 며칠 동안 내셔널 갤러리, 대영박물관, 빅벤, 런던아이, 타워브리지, 캠브리지 대학교, 그리니치 천문대 등 유명 관광지는 대부분 돌아다녀보았지만, 가장 기억에 남는 장소는 오전의 햇살에 반사되어 밝게 빛나던 세인트 제임스 파크였다.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버킹엄 궁전으로 걸어갈 때 우연히 가로질러 가게 되었는데, 너무 깨끗하고 평화로워서 무슨 천국을 걷는 것 같았다. 한가롭게 잔디와 공원길을 가로질러 뒤뚱뒤뚱 지나가는 오리 가족은 사람을 전혀 무서워하지도 않았다. 청설모는 공원길 한복판에서 도토리를 까먹다가 사람이 다가오면 한 번 흘끔 곁눈질만 하고는 그 자리에 그대로 서서 제 할 일을 하는 거다. 순간 마치 동물과 인간이 대화하며 함께 살아가는 만화 안에 들어와 있는 것 같았다. 호수에 유유자적 평화롭게 떠있는 백조를 물끄러미 감상하다가 다리도 풀리고 마음도 풀려 그대로 벤치에 앉아버렸다. 버킹엄 궁전에서 시간 맞춰 진행하는 근위병 교대식에 늦을 걸 알면서도 그 자리에 그대로 멈춰버렸다. 모든 생각을 놓아버린 채, 혼자 그렇게 멍 때리고 몇 시간을 보냈다. 모처럼 환한 날씨에 햇살은 너무나도 따스했고, 미풍의 작은 흔들림이 일상에 치여 까슬까슬해진 마음을 어루만져주었다. 삼삼오오 잔디에 앉아 이야기꽃을 피우며 삶의 여유를 만끽하는 영국인들의 삶이 부러워졌다. 이 세인트 제임스 파크는 영국에서 가장 오래된 왕립 공원인데, 오래전부터 개방되어 런던 시민들의 휴식처가 되어 왔단다. 유구한 역사 속에 수많은 런던 시민들에게 마음의 안식처가 되어준 공원이 먼 동양에서 날아온 낯선 이방인에게도 푸른빛 속살을 내주었다. 우연히 마주한 평화로운 감정의 여운을 이어가기 위해 버킹엄 궁 근위병 교대식 구경 일정은 다음 날로 미뤄둔 채, 그린 파크, 하이드 파크 등 런던의 다른 공원을 걷고 또 걸었다. 빗방울을 머금어 깨끗해진 하늘처럼 공원의 녹음에 흠뻑 젖은 내 마음도 맑게 정화되어 갔다. 그곳에서 천국은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네덜란드 수도 암스테르담을 걷던 중 센트럴 역 앞 운하에서 여러 관광 회사의 운하 크루즈가 정박되어 있는 것을 보았다. 이 운하 크루즈를 타면 1시간가량 도시 곳곳을 둘러볼 수 있었다. 그럴 수 있는 것이 암스테르담은 90개 이상의 섬을 1200여 개의 다리로 연결하여 만들어진 곳이기 때문이다. 즉, 도시 구석구석 거미줄처럼 쳐져있는 운하가 도시의 뼈대 역할을 하기에 운하 크루즈가 이 물길을 통해 승객들을 도시 곳곳으로 안내해 줄 수 있다. 티켓 가격도 합리적이기에 암스테르담을 방문하는 대부분의 관광객들처럼 이 운하 크루즈를 탑승해보았다. 크루즈가 출발하자 처음 잠깐 동안 신기했는데 곧 지루해졌다. 배 안에서 뭍 위로 쳐다보는 암스테르담 도시 풍경이 거기서 거기라 밋밋한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평소 책으로만 전해 들었던 깨끗한 이미지의 네덜란드와는 다르게 운하는 우리나라 서해바다 물처럼 탁한 편이었다. 크루즈의 노선 중간에 안네 프랑크 하우스 쪽에 내릴 수 있었기에 이곳을 구경하기로 했다. 유태인 소녀 안네와 가족들이 아우슈비츠 수용소로 끌려가기 전에 숨어 지냈던 곳인데, 많은 사람들의 눈시울을 적셨던 ‘안네의 일기’가 탄생된 곳이기도 하다. 길게 늘어선 대기 줄을 기다려 입장하게 된 이곳엔 소녀와 가족이 숨어 지내던 좁은 다락방이 역사적 흔적들과 함께 그대로 보존되어 있었다. 나치에 의해 인간의 자유와 존엄이 무참히 짓밟힌 채 낮에는 침 넘기는 소리조차 내지 못하며 숨어 지내던 유태인 소녀 안네는 그곳에서의 생활을 ‘천국과 같은 생활’로 표현했다고 한다. 고난을 행복으로 승화했던 밝고 명랑한 소녀 안네는 해방을 몇 달 남기지 않은 어느 날 밀고자에 의해 발각된다. 그녀는 이내 열악한 환경의 수용소로 끌려갔고 그곳에서 전염병에 걸려 사망한다. 그 역사적 장소에 섰던 나에게 그녀가 말년에 2년 넘게 숨어 살며 일기장에 기록해 간 그날의 참상이 시공을 넘어 다가왔다. 그녀는 이 음지 속에 갇혀 살며 태양 빛 아래 뛰어노는 걸 얼마나 그리워했을까? 벽 한쪽에 빛 대신 어둠을 먹고 자란 그녀와 친언니의 키 변화 상태를 표시한 눈금에 마음이 쓰라렸다. 이렇게 키를 재며 눈금으로 표시했던 그녀들의 어머니는 이로부터 얼마 후 수용소에서 친언니를 어떻게 하려는 독일 경비병에게 반항하다가 이슬로 사라졌다고 했다. 이 모든 참담한 비극은 고스란히 그곳에 남아 있었다. 우리 인류는 이런 비인도주의적인 만행을 결코 반복해서는 안 될 것이다. 나 역시도 인종차별이 없는 사회를 만드는데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되고자 마음 깊이 다짐했다. 갑자기 이런 의문이 생겼다. ‘이러한 일의 재발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세상을 여행하며 눈앞에 목격하게 되는 인종차별 행태에 대해 그냥 피하기보다 강력하게 항의하리라. 어떤 인종차별주의자가 동양 사람에 대한 인종차별을 한다면 이에 당당하게 맞설 수 있는 용감한 사람이 되리라. 그때의 다짐이후 오늘까지도 세계여행 중 인종차별 행위를 목격하게 되면 그냥 피하고 넘어가지 않게 되었다. 인종차별 행위가 있을 때 그곳에 올 다른 사람까지 생각한다면 재발 방지를 위해 이런 행위가 옳지 않다는 것을 명확하게 말하고 다음부터는 하지 말 것을 당당하게 요구할 필요가 있다.
※ 다음 챕터에 계속 이어 나가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