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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글이 Jan 16. 2023

예쁘고 싶은 마음 다 똑같아

나이는 묻지 마세요.

테이블 위에 물 빠진 내 스카프가 놓여 있었다. 태생은 푸른빛 도는 세련된 분홍색과 흰색의 브랜드 로고가 가득 그려진 어여쁜 스카프였는데. 결혼 전 직업여성으로 나름 명성을 떨칠 때 수입 브랜드에서 돈 꽤나 주고 구매한 그 스카프는 내 얼굴엔 너무 안 어울리고 누굴 주자니 본전 생각에 아까웠던 애물단지였다. 다행히 가끔 애들 목에 메어 주면 빛이 나던 그 분홍색 스카프가 거무죽죽한 스카프가 된 데는 별스럽지 않은 사연이 있다.


강이 벗은 옷과 함께 빨래 바구니에 넣은 스카프를 바깥양반이 구분 없이 세탁기로 건조기로 넣어 버렸다. 그 예쁜 분홍색은 온데간데없고 스카프 테두리의 검은색이 이염되어 거무죽죽한 짙은 회색과 밝은 회색이 되어 버렸다. (촉감은 말도 못 하게 망가졌다.) 스카프보다 바깥양반이 소중하니 솟구치는 화는 한숨으로 꺼버리고 이참에 버리자 싶었는데 그걸 겸이 확 낚아 채 갔다. 자기 마음에 쏙 든다나. 그날부터 스카프는 처음 샀을 때 보다 훨씬 더 많이 쓰였다. 그런 별스럽지 않은 사연을 가진 내 스카프가 거실 테이블 위에 놓여 있었다.


갑자기 어머님이 그 스카프를 집어 드셨다. "나 이거 마음에 드는데, 내가 해도 되냐?"라고 물어보시면서. 나는 그 스카프는 물이 다 빠진 망가진 스카프라고, 겸은 그 스카프는 자기 것 이라고 난색을 표했다. 12년째 어머님과 함께 살고 있는 나는 LED전광판처럼 스치고 지나가는 어머님의 표정을 읽었다. "나 이거 딱 필요한데. 모양도 예뻐서 내가 쓰면 딱 좋겠는데. 이거 나 주지."


겸의 것을 뺏아 줄 수는 없는 노릇이고 사실 물 다 빠진 엉망진창 스카프를 어머님께 드린 다는 게 죄송한 일이기도 하고. 그래서 빠르게 내 스카프들을 머리 속으로 검색했다. 몇 개 없지만 그중에 안 어울려서 잘 못 쓴 스카프 하나가 딱 떠올랐다. 짙은 감색에 흰색 도트 무늬 스카프. 내 피부톤을 잘 모르던 시절, 쪽빛과 도트 무늬를 좋아하던 나는 그 스카프의 깊은 빛이 좋아 구매했지만 아무리 둘러봐도 코만 커 보이고 어울리지 않아 고이 모셔둔 것이었다. (퍼스널 컬러 진단 결과 그런 색이 전혀 어울리지 않는 봄웜톤이라는 말을 듣고 깨끗하게 취향을 포기했다.) 마침 눈에 보이는 곳에 곱게 누워있는 그 스카프를 들고 어머님 방으로 갔다.


우리 집 바깥양반의 분홍빛 도는 하얀 피부는 어머님한테 물려받은 유전자다. 그리고 그 유전자를 우리 두 아이가 물려받아 남다른 피부톤으로 세간의 부러움을 받고 있다. (나는 위에서 언급했듯 노랑 노랑한 봄웜톤.) 그래서 식구들은 모두 차갑고 세련된 컬러가 참 잘 어울린다. 여든넷임에도 우리 시어머님 또한 짙은 쪽빛이 무척 화사하게 잘 어울리신다. 윤기 반질 반질한 쪽빛 스카프를 들이밀었더니 어머님이 좋다고 연신 감탄하신다. 크기도 무늬도 색도 감촉도 마음에 든다며 얼굴 만면에 미소가 가득하신 게 꼭 소녀 같으시다. 우리 어머님 젊은 시절 편히 멋 한 번 부려 보지 못하셨는데 지금이라도 하고 싶으신 것 다 하시며 사시면 좋겠다. 나는 내 새끼들한테 고운 피부 물려주신 것으로 충분히 감사하니까. 한동안 고운 쁘띠 스카프 찾아다니느라 흐린 눈에 불을 켜고 다닐 것 같다. 나는 안 어울리는 차갑고 세련된 색, 어머님 사드리며 대리만족 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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