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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글이 Jan 17. 2023

포기하지 않기

그럼 어쨌든 완성된다.

딱히 튤립을 좋아하는 건 아니다. 짬은 수업 전까지 따라 그려보고 싶은 그림을 선정해 오라는 과제를 주기 때문에 뒤져보다가 발견하게 된, 누군가가 그린 튤립 세 송이가 수많은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에 이끌려 처음 모작을 한 것이 시작이었다. 


내게 그림을 그리는 행위는 무척 어려운 범주지만 그중에도 특히 사람 그리기가 가장 어렵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에 그깟 꽃 즘이야 하는 마음으로 따라 그려 보았다. 작은 습작 수첩에 두 송이를 따라 그렸는데 하나는 플라스틱 꽃으로 한 송이는 작약으로 피어 버렸다. 두 번째 그린 튤립은 꽃잎의 자연스러운 흐름을 흉내 내긴 했으나 어쨌거나 들려오는 이야기는 없고 튤립의 정체성을 명명백백 밝혀주지 못했으니 실패한 그림이었다. 


그래도 별 생각은 없었다. 선에 삶을 불어넣지 못하는, 선을 그린 경험이 부족한 초보의 실패라고 단순히 규정지었다. 짬을 만나 가르침을 받으면 뚝딱 그려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첫 수업으로 그린 풍경화의 과정과 결과가 모두 만족스러웠으니까. 오늘 수업을 상상조차 하지 못 한 채 지난주에 그린 풍경 숙제 두 장과 튤립 그림 한 장을 가지고 가벼운 마음으로 짬의 집에 갔다. 


주로 축제나 정원에 인위적으로 심어진 튤립의 군락을 본 경험뿐인 나와 짬은 일단 과제로 선정해 간 그리고 싶은 그림 중 하나인 튤립 군락을 그려 보기로 했다. 쉽게 따라 그릴 수 있는 그림이라는 짬의 말을 믿었다. 지난주 풍경 그림을 그릴 때 그녀의 말처럼 생각보다 쉽게 잘 그려낸 경험이 있으니까. 그런데 줄기를 그리는 것부터 난관이었다. 선이 뻣뻣해서 도무지 살아있는 생명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세 장의 줄기를 그린 다음 꽃을 그릴 자리가 있는 첫 번째 줄기에 튤립을 그려 넣기로 했다. (나머지 두 장은 풀밭 아니 대파 밭이 되어 버렸다.) 단순화시킨 튤립을 따라 그리는데 꽃은 없고 전신에 말발굽뿐이다. 다시 튤립을 그리고 그리다 결국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문제점을 짬이 발견했다. 나는 원근법과 배열, 구도에 대한 이해가 전혀 없었다. (다중지능 검사 결과 공간 지각 능력이 약점 지능으로 나온 나.)


아무리 취미로 배우는 그림이라도 기본 이론을 모르면 지경이 넓혀지지 않음을 깨달은 짬은 투시 원근법과 구도를 잡아 꽃을 배열하는 것을 가르쳐 줬다. 이과적 이해가 낮은 나는 투시 원근법이  기하학처럼 다가왔고 구도를 잡는 것이 과학자의 직관적 관찰처럼 다가왔다. 연필을 쥐고 투시 원근법 연습을 하고 구도를 잡아 튤립의 형상을 따보는 등 장장 3시간 20분을 튤립만 그렸는데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어제 남편한테 96색 오일 파스텔 사달라고 했는데 후회가 밀려왔다. 나가는 길에 사지 말라고 해야겠다, 몰래 마음먹고 있는데 짬이 그런다. “다음 주에 꼭 와야 해. 안 오면 안 돼. 안 되겠다, 쉬운 거 하나 그리고 가.” 아이고, 딱 들켰네. 


짬은 꽃 그림이 사실 사람만큼 그리는 것이 어렵다고 그래서 자신은 꽃을 안 그린다고 했다. 그러면서 튤립의 형상을 잡아 그리는 것을 보니 20년 넘게 쌓아온 기본기와 연습량이 보인다. 진짜 안 그린 사람(나)과 확연히 차이가 났으니까. 짬은 자신의 그림을 보고 연신 감탄하며 배고프다 불퉁거리는 나를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격려했다. 우여곡절 끝에 완성한 내 튤립들을 챙겨 들고 돌아왔다. 다시 들춰본 연습장엔 아까와는 다른 우아한 튤립 몇 송이들이 하늘거리고 있었다. 지난 주에 이어 또 내 그림들이 마음에 든다. 마침 전화한 남편은 오일파스텔을 주문했다는 소식을 전해줬고 이번 기회에 일주일 내내 튤립만 그려보자, 의지를 불태울 때 카톡엔 수십만 송이로 보이는 튤립 정원 그림 두 장이 날아왔다. 



“네 덕분에 나도 일주일간 플라워 프로젝트 하려고. 너도 같이 그리자. 내가 몇 장 더 그려서 보내 줄게.”

제자의 두 손에 희망을 보며 함께 하자는 짬 덕분에 나도 나의 한계를 탈출해 앞으로 나아간다. 나는 오늘보다 내일 더 잘 그리게 되겠지. 실패는 과정일 뿐, 단정 지을 결과가 아님을 짬에게 그림을 배우며 알아간다. 그래 적성보다는 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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