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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글이 Feb 17. 2023

너의 방학이 좋아!

점심 같이 먹어줘서 고마워, 아들!

여름방학이 정확하게 100일이었으므로 겸은 올 겨울 혹독한 얼음 바람을 견디며 학교를 다녔다. 학교 등교 시간은 예나 지금이나 왜 이렇게 이른 지, 지각을 절대적으로 싫어하는 겸 때문에 전 날 몇 시에 잠들었는지 와 상관없이 늦어도 7:30에는 기상을 해야 시간을 맞춰줄 수 있다. 그래서 나는 방학이 좋다. 시간에 쫓겨 동동 당당하지 않아도 되니까. 겸에게 방학의 의미는 더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 같아 생략한다. 남들이 다 겨울 방학으로 지지고 볶고 있는 동안 우리는 얼음 낀 시린 바람을 삼키며 3학년을 보냈다. 그럼에도 시간은 흘러가고 우리에게 짧은 봄방학이 찾아왔다.


방학이 좋은 이유는 나의 점심을 겸상할 친구가 생기는 것이다. 대부분의 날은 집에서 일품요리를 해 먹지만 어떤 날은 먹고 싶은 것을 정해서 밖으로 나갈 때도 있고, 꼼짝하기 싫은 날은 배달도 하며 즐거운 점심시간을 갖는다. 집 가까운 회사를 다니는 덕에 남편과 짧은 데이트 겸 점심을 먹을 때가 많았는데 어쩌다 팀장으로 승진한 남편은 점심시간에도 회의하는 날이 많아졌다. 혼자 밥 먹기를 잘 못 하는 나는 내내 점심이 버거웠는데. 드디어 점심 함께 먹을 수 있는 방학이 와서 마냥 반갑다. 


오전에 영어 홈스쿨링을 마친 겸과 함께 데이트를 나섰다. 비록 영상의 체온임에도 아직 싸늘한 바람이거늘, 목련 나무의 꽃눈은 하루가 다르게 솟아오르고 있었다. 아침은 퀸 엘리자베스가 생전 즐겨 드시던 오이 샌드위치를 해먹었으므로 점심은 밥으로 정했다. 10년 전, 에그 베네딕트가 맛있어 미여 터지는 대기를 버티며 먹던 브런치 카페가 돌연 밥집으로 변했을 때 아쉬운 마음에 왜 바꾸셨냐 따지듯 여쭤봤다. “빵 말고 밥 먹고 싶어서요!.” 당당한 사장님의 그 말 한마디에 밥이 먹고 싶을 때면 고민도 없이 가게 되는 내 단골 식당. 가정식 백반 집이지만 놋그릇과 도자기 그릇으로 융숭하게 차려 주시는 밥이 정말 좋다. 


“딸은 어디 가고 둘만 왔어요?” 반갑게 맞아 주시는 사장님께서 보이지 않는 강의 안부를 물어보셨다. 강은 등원했고 겸은 방학이라 같이 점심을 먹으러 왔다고 하니 사장님이 겸이 눈을 보며 한 마디 하신다. “더 먹고 싶은 거 있으면 아줌마 불러!” 


우리는 나란히 앉아 밥을 먹었다. 아이들은 마주 보는 것보다 자기 옆에 앉아 먹는 걸 더 좋아하더라. 젓가락처럼 나란히 앉아 젓가락을 놀리는 우리 모자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열심히 먹었다. 미역국의 건더기를 국수처럼 후루룩 먹으며 김치찜에 밥을 싸서 제육 불고기와 열심히 먹는 겸. 깊은 놋공기 가득 담아 주시는 밥을 다 먹을 재간이 없는 나는 반절이나 남겼는데 겸은 겨우 두 숟가락 남겼다. 내 밥그릇 자기 밥그릇 둘레둘레 살피더니 자기가 나보다 더 많이 먹었다며 놀랜다. 겸은 태어났을 때부터 나보다 많이 먹었는데! 자신의 실체를 마주한 겸은 담담하게(?) 숟가락을 내려 놓았다. 


식사 시간 방해를 하고 싶지 않아 미리 결재를 하자고 겸에게 카드를 주니 사장님께서 물어보신다. “이제 2학년? 3학년?” 4학년이라고 하자 깜짝 놀라신다. “세상에! 뱃속에 있을 때가 엊그제 같은데! 장사 없네, 장사 없어!” 무심하게 흘러간 10년이란 시간이 갑자기 눈앞에 실체를 드러내서일까? 우리를 보는 사장님 눈빛에 경이로움과 촉촉함이 뿜어져 나온다. 그 눈빛에 내 마음도 저릿하며 뭉클한 감정이 훅 올라온다. 나의 기억으로만 남고 세상은 모를 지극히 사적인 시간을 공유할 수 있는 타인과 공간이 있다는 건 참 감사한 일이다. 


든든하게 밥을 먹고 남편과 자주 가는 카페에 갔다. 겸은 에그 타르트와 망고 스무디를 나는 평소처럼 따뜻한 아메리카노를 주문한다. “엄마! 엄마는 왜 맨날 아메리카노만 마셔?? 다른 거 달달한 것도 먹어봐!” 할 말이 없다. 달달한 커피. 나도 먹고 싶은데 살찔까 봐 못 먹는다고 이실직고하자니 살찌는 거 무서워하는 엄마로 기억될까 봐 멋쩍게 웃으며 위기를 모면한다. 겸은 나보다 밥을 많이 먹고 받은 충격은 벌써 잊었다. 공복 인간처럼 에그 타르트와 망고 스무디를 먹었다. 내 점심 친구는 정말 열심히 성장하고 있는 중인가 보다. 소 한 마리 먹는 나이 되면 어찌해야 할까. 벌써 고민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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