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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글이 Feb 20. 2023

나는 멋진 엄마

자화자찬 많이 하고 싶은 날.

강을 데리러 가는 길, 찬 바람 한 숨 들이켜니 으슬으슬 춥다. 겸과 나는 호들갑을 떨며 얼음 바람을 지치고 차에 올라탔다. 하지만 시동 꺼진 차 안이 밖의 온도보다 따뜻할 일은 없으니 뼈를 파고드는 시트의 냉기를 체온으로 데우며 얼른 엔진이 달궈 지기를 기다렸다.  


터전에 도착하니 졸업식 때 장식으로 쓰고 남은 풍선이 아이들 차지가 되어 있었다. 아이들은 각자 좋아하는 색의 풍선을 가지고 놀면서 들떠 있었다. 하얀색을 좋아하는 강도 친구들 틈에서 자기 몸만큼 큰 풍선을 가지고 신나게 놀고 있었다. 하원을 하는 동안 풍선 하나에 희비가 교차한다. 강은 가져서 기쁨이 겸은 없어서 아쉬움이. 하지만 나는 겸과 강의 감정선에 관심을 둘 여력이 없었다. 춥고 배고픈데 잠도 오기 시작했으니까. 이제 나는 생존에 위협을 받는 한 마리 파충류가 될 수 있으므로 조심해야 했다. 사소한 곳에 고도의 사유를 요하는 일을 했다가 화를 폭발하는 악어 엄마가 되는 경험을 무수히 했으므로 최대한 아이들의 마음을 간단히 돌봐 주고 운전에 집중했다. 


집으로 향하는 길목, 생협에 들러 장을 봐야 했다. 콧물을 훌쩍이는 겸은 차에 남겠다고 했고 간식을 사겠다는 목적의식이 뚜렷한 강은 내리겠다고 했다, 그 큰 흰 풍선과 함께. 겸은 바람에 날려가니 차에 두고 가라고 했지만 강은 자기도 7짤 형님이라 힘이 세다고 주장했고 나는 졸렸으므로 아무 생각 없이 둘의 논쟁이 끝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장을 다 보고 나오는 길, 무거운 장바구니를 낑낑대며 차 트렁크에 싣는 내 뒤통수에 대고 강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른다. 자세히 들어보니 풍선을 잡으란다. 평소에도 반응이 빠르지 않은데 나는 졸린 상태였으므로 강의 말이 무슨 소리인지 한참을 생각했고 그 사이 커다란 흰 풍선 하나가 내 시야에 들어왔다. 날아가고 있었다. 그제야 사태 파악이 된 나는 안타까움을 눈물로 쏟아내며 발을 동동 구르는 강에게 달려갔다.  강은 꼼짝하지 않고 시뻘게진 얼굴로 풍선을 잡아오라고 한다. 아, 가혹하다. 하나님은 왜 엄마에게 하늘을 날 수 있는 능력을 주지 않으신 건지!


잠깐 다시 눈을 돌려보니 풍선이 바닥을 기기 시작했다. 바람의 방향이 바뀌며 바닥에 눌러진 것이다. 오! 나의 짧은 원성을 들으신 것일까? 가까이 가서 보니 주차장 밖 길가에 놓인 풍선은 바람 발에 슬슬 차이고 있었다. 주차장이 철재로 된 높은 담을 가지고 있으므로 바람이 바뀌기 전에 밖으로 돌아 나가야 했다. 아주 큰 목소리로 따라오라는 말을 남기며 뛰었다. 중범죄자를 뒤쫓는 형사의 마음이 내 마음과 같을까? 돌아 나가는 동안 풍선의 위치와 바람의 방향을 전혀 파악할 길이 없었으므로 기도하는 마음으로 뛰어갔으니까. 


아직 바람이 누르고 있는 바람에 흰 풍선이 차 사이사이로 굴러다니고 있었다. 잽싸게 잡아 채 뒤따라온 강에게 안긴다.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눈과 새빨갛게 달아오른 코를 찡그리며 강이 환하게 웃는다. 바람과 사투를 벌이며 풍선을 구해 와 차에 앉으니 온몸이 흘러내리는 기분이다. 아, 이대로 잘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집에는 가야지, 저녁은 먹어야지. 다시 시동을 건다. 


저녁 준비를 하고 있으니 내복 바람의 강이 신바람이 나서 내게 온다. “엄마! 풍선이 눈이랑 입을 그려줬어. 풍선이가 이제 이 눈으로 세상을 볼 수 있고 이 입으로 맛있는 밥을 먹을 수 있게 돼서 정말 행복하데. 나, 있다가 풍선이랑 같이 밥 먹을 거야!” 말간 얼굴로 나에게 욜랑욜랑 설명해 주는 강을 보며 가만 생각해 본다.터전에서 친구들과 함께 고민하며 고른 이 흰 풍선은 집으로 가져와 ‘풍선이’로 다시 태어날 예정이었구나. 눈과 입을 그려주고 함께 대화를 하고 밥을 먹는 그 모든 이야기를 상상하며 놀고 있었구나. 


날아가 버린 흰 풍선처럼 물건을 잃어버리거나 망가져서 울고 있는 겸과 강을 달래기에만 급급했던 나머지 그 물건을 함께 찾아보거나 고쳐볼 생각은 하지 않고 새것을 쥐어주던 지난날들이 생각났다. 우리 아이들이 결핍 없는 세상에서 사는 건 독이라고, 자기 물건을 소중히 여길 줄 알아야 한다며 청산유수 달변가처럼 떠버리고 다니면서 정작 나조차 그 풍요 안에서 아이들을 편하게 키우고 있었다. 


평소와 달랐던 낯선 나를 반갑게 맞이하며 ‘풍선이’를 지켜준 것에 감사를 전한다. 피곤한 몸을 핑계로 강퍅하게 행동하지 않았고 바람은 이길 수 없다며 쉽게 포기하지 않은 나를 칭찬해 준다. 나는 어른답게 나의 신념과 딸의 마음을 지켜낸 멋진 엄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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