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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글이 Mar 28. 2023

낡아짐을 생각하다.

나는 너의 미래를 살고 있어.

출처_네이버 무비
 오십 살 먹은 여자도
스무 살 남자를  꼬실 수 있어.

영화 ‘파리로 가는 길’에서 앤의 친구가 하는 말이다. 영화는 나이가 쉰이 될 동안 남편의 뒷바라지만 하며 살던 앤이 외간남자 자크와 칸에서 파리로 가는 여정을 담고 있다.


프랑스 남자 자크는 특유의 섬세함과 낭만적인 감성으로 앤을 대하며 파리로 향한다. 앤은 자크가 비추는 자신의 모습을 보며 마이클의 아내가 아닌 앤, 자신으로 인생을 살아 볼 마음을 먹는다. 영화는 앤이 의미심장한 미소와 함께 머리를 묶으며 끝난다.


남자들은 백이면 백 모두 다 싫어하고 여자들은 모두 쌍수를 들며 좋아하는 영화. 그런데 이 영화의 주제와 상관없이 내 귀에는 앤의 친구가 한  말 한마디만 몇 년째 꽂혀 있다.




나이 불혹에 이제는 어떤 유혹에도 그냥 흘러가보겠다 마음먹었건만. 여전히 거울 앞에서 보이는 내 얼굴에는 스무 살, 빛나던 시절의 내 얼굴이 스치며 현실을 우울하게 한다. 아무리 눈웃음을 지어도 주름 한 줄 보이지 않던 내 눈가에도 어느덧 엷은 웃음 주름이 아코디언처럼 잡혀있다.


입가는 좀 더 심각하다. 양 코볼 옆으로 여덟 팔자가 문신처럼 야무치게 자리 잡았다. 몇 달 전만 해도 이렇게 두드러지지 않았는데 한 살 더 먹은 탓인가? 설상가상 그 팔자 라인을 따라 자꾸 뾰루지가 올라와 시선을 강탈하고 있으니 어느 순간 거울을 보며 나와 눈 맞춤을 하는 대신 그 문신들을 바라보며 야속한 세월 탓만 하게 된다. 어디 팔자주름뿐인가. 탱탱하게 올라 붙어있던 볼살은 이제 중력을 이겨낼 힘이 없어진 듯 녹아내리는 고무 마냥 쳐져 있다.


머리카락 색이라도 깜깜하면 좋을 텐데. 태어날 때부터 색소가 부족해 밝았던 갈색 머리는 이십 대 중반부터 유전의 힘을 이기지 못하고 쇠기 시작했다. 삼십 대 중반까지만 해도 가려질 만큼만 났는데 이후로 염색 말고는 방법이 없었다. 새치를 핑계로 한 두 해 열심히 이런저런 색으로 염색을 해봤다. 그런데 무슨 일인지 굵고 튼튼한 내 머리칼이 얇아져 우수수 빠져나왔다. 염색을 포기했다. 흰머리라도 숱 많은 머리가 백번 천 번 나으니까.


흰머리가 다시 애물단지가 된 건 지난주부터다. 강을 데리러 터전에 갔다가 아이들에게 붙잡혀 같이 놀았다. 아이들이 내 머리를 잡고 미용실 놀이를 하다가 불현듯 물었다. “별글이! 별글이는 머리가 왜 이렇게 하얘? 별글이 백 살이야?” 흔들리는 동공을 부여잡으며 “아니! 내 머리에도 벚꽃 핀 거야!”라고 응수해 보았지만 아이들한테 나는 이미 백 살 별글이로 낙인찍힌 모양이다. “어? 아닌데, 흰머린데? 백 살 맞네.” 하며 그 특유의 순수한 표정으로 갸우뚱갸우뚱 살펴봤으니까. 아이들은 내 나이의 두 배에 스무 살을 더해 먹여 버렸다.


아이들이 억지로 먹인 육십을 곱씹으며 생각한다. 일곱 살 꼬마들 꼬시는 것도 실패했는데 스무 살 남자를 무슨 재주로 꼬시나?




새 물건을 사면 그 물건이 적당히 낡아 노련하게 작동될 때까지 길을 들여야 한다. 예를 들면 자동차가 그렇다. 새 차는 매뉴얼에 지정된 키로 수 까지는 RPM 1,500 이하로 살살 몰아야 한다. 심지어 F1에 출전하는 새 차들은 경기에서 좋은 기량을 뽑을 수 있도록 길들이는 전용 드라이버가 있다고 하니 새 차라고 무조건 잘 굴러가는 건 아닌 것이다.


다시 생각해 본다. 눈부신 아름다운 시절 나는, 자갈밭을 굴러가는 삶이 불편하고 어려워 빨리 벗어나고 싶었다. 그로부터 곱절을 살아 낸 지금, 삶은 여전히 자갈밭 위에 있지만 적당한 나의 속도를 찾아 편안하게 굴러가고 있다. 미숙하던 시절엔 삶이 매끈한 아스팔트 위에 올라가 쌩쌩 달려야 한다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반쯤 성숙해지고 나니 알게 되었다. 세상에 잘 포장된 길은 없고 다만 평온하게 가는 방법만 있다는 것 말이다.


오십 살이 스무 살을 꼬실 수 있는 힘은 아마도 이런 평온함에서 풍겨져 나오는 기품일 것이요, 만면에 새겨진 시간의 자국을 자신의 것으로 담대하게 받아들인 자만이 가질 수 아름다움일 것이다. 낡았지만 반짝반짝 윤이 나는 골동품은 누구나 탐내는 물건인 것처럼 작가는 그 대사를 통해 중년의 품격과 아름다움을 지지하고 있었다.




비록 껍데기가 본격적으로 낡기 시작하는 나이에 들어서고 눈으로 직접 노화를 목격하고 있지만 다시 스무 살의 시절로 돌아가라 한다면 나는 고민 없이 거절할 것이다. 아침이면 겸과 강의 보드라운 살결에 볼 비비며 일어나 하루를 열고 저녁이면 내게 귀 기울이며 외롭지 않은 고독을 선택하는 지금의 삶이 스무 살의 내가 그토록 원하던 미래였으므로.


이십대의 나에게

세상의 잡음에 휘청 거리며 온갖 상처를 품고 살았던 스무 살의 나에게 불혹의 내가 안녕을 전해본다. 나는 네가 꿈꾸던 미래를 살고 있다고. 다정한 남편과 예쁜 아이들에게 사랑을 듬뿍 받고 원 없이 글을 쓰고 평생 하고 싶었던 공부를 드디어 시작했다고 말이다. 그러니 이제 그 시간 속에서 찬란하게 빛나 주기만을 부탁하고 싶다.


담담하게 살아내.


이십 년 뒤엔 이순의 내가 지금의 나에게 말을 걸겠지. 네가 꿈꾸던 그 미래에서 왔다고. 지금 하고 있는모든 걱정과 불안은 나의 미래에 하나, 영향을 끼치지 못 했으니 담담하게 지금을 살아내라고 말이다. 몸은 비록 낡았지만 마음은 늘 새 것인 채 나는 너의 반짝반짝한 미래를 살고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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