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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글이 Apr 30. 2023

오늘은 직관하기 좋은 날

그리고 사랑의 태도를 배우기 더없이 좋은 날

처음으로 축구 직관을 했다. 어제 그렇게 아팠는데 오늘 가야 한다는 생각에 몸을 벌떡 일으켰다. 여전히 목도 아프고 옆구리도 욱신거리는데 오랜만에 세 가정이 모여 함께 놀 생각을 하니 유체이탈이라도 한 것처럼 힘들지 않았다.

택시에서 내려 걸어가는 길

이미 두 시간 전에 근처에 도착한 우야네 소식에 따르면 주차장은 이미 만원이고 차는 꼼짝을 못 하고 있다고 했다. 우리는 치킨을 담당하고 있었기 때문에 출발이 늦었는데 그 소식을 듣고 택시를 이용하기로 했다. 치킨 냄새가 진동하는 한살림 장바구니를 들고 월드컵 경기장으로 향했다.


어제까지 비가 온 관계로 날씨가 쌀쌀했다. 쨍한 햇살이 무안할 지경이다. 웬 바람이 심하게 부는지 민들레 홀씨 같은 강은 바람에 떠밀려 잘 걷지도 못했다. 문득 서쪽으로 잡은 자리가 춥지 않을까 걱정이 몰려왔다.

전반 시작전 대전 시티즌 vs 제주 유나이티드

하지만 기우였다. 야외임에도 자리를 빼곡히 채운 사람들 덕분에 좌석 사이사이엔 온기가 채워져 있었다. 게다가 승리를 기원하는 응원으로 고조된 열기는 싸한 바람을 잊게 했다. 이것이 경험의 이유일까? 하나의 함성을 만드는 수백 명의 목소리와 휘날리는 깃발, 둥둥 울리는 북소리에 내 마음이 같이 뜨거워졌다.


메인 관중석에서 벗어나 앉아 있었으므로 함께 동화될 수 없음이 아쉬웠다. 하지만 나는 누구인가. 남에게 피해 주지 않는 선에서, 상식 안에서 하고 싶은 건 꼭 하는 사람 아니었나. 나는 메인 관중석의 응원에 맞춰 열심히 소리 지르며 어느새 초보 관람자에서 열성적인 팬으로 행동하고 있었다. 인후통쯤이야, 간에게 조금 더 미안해하며 타이레놀 먹으면 되지.

후반전 킥오프

결과는 졌다. 골을 넣을 수 있는 기회가 몇 번이나 있었지만 희한하게 비껴갔다. 마치 승리의 여신이 오늘은 대전팀에게 한 골도 허용치 않겠다고 단단히 마음먹은 것처럼 공은 간발의 각으로 허공을 가로질렀다. 나는 골이 비켜나갈 때마다 아쉬움에 터지는 화로 남편의 멱살을 잡았다. 그러나 화내는 사람은 갱상도 사람인 나 하나뿐, 끝까지 격려하며 한 목소리로 선수들을 응원하고 격려하는 메인 관중석의 팬들을 보며 진짜 사랑으로 키운 구단임을 느꼈다.


아가씨 때 롯데 홈경기 직관을 위해 사직구장에 갔던 기억이 났다. 첫 끗발이 개 끗발이란 말을 몸소 증명하기로 유명한 롯데. 그땐 이미 계절이 가을에 다가가 있던 터라 롯데의 경기력이 바닥을 칠 때였다. 회식 차 어쩔 수 없이 갔다가 역시 경기가 지는 바람에 화난 아저씨들 틈에서 움찔거리며 경기장을 빠져나왔던 기억이 난다.

끝까지 응원하던 대전 시티즌 팬들

아저씨들은 눈만 마주치면 욕을 뱉으며 시비를 걸어왔다. 술이 많이 취해 정신줄도 놓으셨겠다, 경기도 졌겠다, ‘하나만 걸려라’ 딱 이 마음으로 비틀비틀 방황하고 있었다. 인파에 휩쓸려 일행과 떨어진 나는 눈물을 질금거리며 집으로 향했던 기억이 난다. 그 이후로 직관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는데 오늘 같은 분위기라면 아이들과 얼마든지 다닐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졌는데 끝까지 남아 응원해 주고 격려해 주는 모습은 아이들에게 주고 싶은 사랑이자 태도이니까.


나도 다음엔 남편 멱살 잡지 말아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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