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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글이 May 05. 2023

도시락을 싸야 해요.

귀찮음과 설렘, 엄마만이 누릴 수 있는 양가감정에 대하여.

몇 날 며칠을 앓고 있는지 모르겠다. 열도 나는 것 같고 삯 신이 쑤신다. 임파선이 부어서 목이 아픈 건지 목이 아프고 몸이 안 좋아서 임파선이 부은 건지 모르겠지만 턱 바로 밑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냥 차라리 못 일어날 만큼 아프면 안 되는 건가? 약을 먹으면 움직일 만하니 누워 있을 수가 없다. 그렇게 일주일을 살아왔다.


그 일주일 중 하루는 겸의 현장 체험학습이 있는 날이었다. 수요일 저녁에 실시간 온라인 수업을 들어야 하니 컨디션 조절을 해 놓은 상태였다. 목이 너무 아파서 아무 말도 할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수업을 듣는 데는 지장 없으므로 참석했다. ‘아픈 상태로 3시간을 앉아 수업을 듣는 게 쉬운 일은 아니네.’ 혼자 꽁알꽁알 끙끙 앓으며 수업을 듣던 그날, 수업은 30분이나 더 늘어졌고 10시 30분에서야 줌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글을 써야 했으므로 곧바로 워드를 실행시켰다. 매일 밤 강을 재우는 옆에 누워 핸드폰으로 글을 썼는데 남편이 일찍 들어온 덕분에 엄마의 일상을 일찍 마감할 수 있었으니 더없이 훌륭한 시간이었다. 한 시간 남짓 시간을 자판 두드리는 소리로 채우며 나와의 대화를 이어갔고 그렇게 자정이 조금 넘은 시간이 되어서야 마법에 풀린 신데렐라처럼 나의 공간에서 빠져나갔다. 아쉽지만 나를 기다리며 졸린 눈을 이겨내고 있는 남편에게 돌아가야 하는 시간이 된 것이다.




찌니꼬미, 출처

하지만 나가자마자 나를 반긴 것은 아일랜드 식탁 위에 잔뜩 쌓인 장바구니들. 다음 날이 겸의 현장 체험 학습 날인 것이 반사적으로 떠올랐다. 큰일이다. 도시락으로 유부초밥을 싸 달라고 해서 장을 잔뜩 봐왔는데, 저것들을 내일 아침에 준비하려면 5시엔 일어나야 할 판이다. 일찍 일어나는 것은 못해도 피곤한 몸으로 하루를 조금 더 사는 건 가능하니 해야만 했다. 짜증이 스멀스멀 올라온다. 아, 몸은 아프고 피곤한데 쉬지 못하는 엄마의 일상이여! 내 마음을 읽었을까? 남편이 얼른 와 무엇을 거들어 줄까 하며 주방을 기웃거린다. 사랑스러운 남자 같으니라고.


그렇게 자정이 넘은 시각 아들을 위한 도시락 준비를 했다. 다진 고기는 키친타월로 꾹꾹 눌러 핏물을 제거하고 미림과 설탕을 버무려 누린내를 잡고 단맛을 먼저 입힌다. 그러는 동안 다진 마늘과 간장, 액젓, 참기름을 비율에 맞춰 고기 양념장을 만든다. 단맛을 먼저 입힌 고기에 다진 양파와 함께 양념을 넣고 버무리면 설탕을 적게 넣어도 단맛이 적당히 베여 건강하고 맛있게 먹을 수 있다. 유부초밥의 속 재료로 들어갈 예정이니 간은 섬섬하게 해야 한다.


당근은 미리 다져 놓았다. 칼질은 무조건 마음의 여유가 우선이다. 급하면 재료보다 내 손을 썰어버리니 미리 작업해 두는 것 좋다. 어슷 썬 당근을 가늘게 채 썰고 그걸 다시 다지면 된다. 이유식 만들 때 푸드 프로세서 사용이 귀찮아 칼 잡던 실력이 어느새 고수가 된 나. 뭐든 쓸데없는 경험은 없다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닫는다. 매번 나의 경제적 능력을 아쉬워하는 평가로 끝나는 게 흠이긴 하지만.


내가 속 재료와 사투를 벌이는 동안 남편이 쌀을 씻어 안치고 나오는 그릇들을 족족 설거지해 준다. 주방 보조로 완벽한 남편. 좀 부족한 면은 내가 몰래 고치면 그만이니 도와주는 걸로 높게 칭찬해 준다. 나는 남편의 보조에 마음 놓고 다음 작업을 진행한다. 유부초밥에 절대 빠지면 안 되는 재료, 바로 우엉이다.


우엉은 가늘게 채 써는 게 어려운 채소이므로 채칼을 이용한다. 일전에 채칼을 쓰다가 심한 자상을 입은 적이 있으므로 남편은 조심하라는 애정 어린 잔소리를 한다. 뭐, 애정이 묻어도 잔소리는 듣기 싫으니 나는 콧등으로 대답하며 채칼과 우엉 사이 나의 신경을 집중한다. 사실 나도 서걱 살 베이는 느낌과 기분 나쁜 통증은 다시 경험하고 싶지 않다. 욕심은 버리고 적당히 채가 썰어지면 나머지는 칼로 잘랐다. 우엉은 성질이 매우 급해 껍질을 까는 즉시 갈변을 시작해서 엷은 식초물에 담가 두어야 한다. 그럼 갈변도 막고 우엉 특유의 쓴맛과 떫은맛도 우려낼 수 있다. 모든 재료 준비를 끝내고 자리에 누웠다. 여섯 시 삼십 분 기상을 목표로 새벽 한 시 삼십 분에 눕는 이 쫄깃한 마음, 누가 알까?




겸이 깨워 눈을 뜨니 아침 일곱 시였다. 뭐라고 일곱 시??? 3킬로그램의 목화솜이불을 박차고 나왔다. 여유, 여유, 여유. 급할수록 돌아가야 한다고 내 마음을 다독이며 밥솥 뚜껑부터 연다. 남편은 밥 물을 항상 많이 맞춰 밥이 좀 질게 된다. 평상시 먹을 때는 상관없지만 단초물을 부어야 하는 오늘은 밥이 필시 좀 되야 하므로 물을 조금 따라 버린다. 밥솥 뚜껑을 잘 맞춰 덮고 불을 댕긴다. 바쁠 것을 예상해 미리 재료를 준비해 두고 과일과 과자, 단무지를 도시락에 싸 둬서 다행이었다. 냉장고에서 주섬주섬 준비해 둔 재료들과 도시락통을 꺼내며 스스로에게 다정한 칭찬을 건넨다. 어제의 나, 정말 애썼어!


다진 당근 뚜껑부터 열어 소금을 친다. 당근을 소금에 절여 볶으면 익히는 시간도 줄어들고 간을 따로 할 필요가 없어서 간편해짐으로. 다음은 우엉 차례다. 밤사이 식초물에 담겨있던 우엉을 건져 생수에 헹군 다음 칼로 다진다. 그 사이 절여진 당근은 물기를 뺄 필요 없이 바로 예열한 스탠 펜에 볶는다. 볶음용 올리브오일은 엑스트라 버진 오일보다 향은 덜하지만 당근과 어우러지면 매혹적인 향이 난다.


난 볶은 당근이 왜 이렇게 좋은지. 간 보는 핑계로 살짝 먹어보니 일품이다. 당근을 볶은 팬에 바로 다진 우엉을 넣는다. 우엉은 조릴 때 설탕으로 먼저 단맛을 입혀 볶는다. 설탕이 다 녹으면 간장을 넣어 우엉에서 나온 수분과 함께 조려 주다가 꿀을 살짝 둘러 윤기를 더해준다. 마지막은 고기다. 미리 냉장고에서 꺼내 놓으면 냉기가 빠져 금방 익는다. 다른 작업은 필요 없이 수분이 다 날아갈 때까지 잘 볶기만 하면 된다. 속 재료를 모두 준비하고 시계를 보니 아직 30분 밖에 지나지 않았다. 그 사이 밥이 다 되어 압이 빠진 상태. 이제 유부에 초밥을 넣기만 하면 되었다.




김이 폴폴 올라오는 밥을 주걱으로 푹푹 퍼서 양푼이에 담았다. 단초물의 배합 비율을 알고 있지만 오늘은 고도의 산업화와 자본주의가 낳은 제품에 의지할 예정이다. 옛날, 우리 엄마는 생 유부를 사 와 직접 졸이고 단초 물도 끓여서 만들어 주었는데. 공산품에 의지한 내 유부초밥의 근본이 갑자기 없어진 것 같아 잠깐 좌절했지만 이내 편안하고 안락한 삶을 제공한 자본주의와 시장경제 만만세를 외치고 작업에 들어갔다. (물론 그 어두운 면을 모르고 하는 말은 아닙니다만,)


뜨거운 밥에 단초 물들을 붓고 창문을 열어 식히며 뜨거운 열기와 함께 초가 날아가도록 휘휘 저었다. 역시 밥물 빼기를 잘했다. 알맞게 된 밥이 단초물을 만나 식감 좋은 초밥이 되었으니까. 이제 볶아 둔 재료들을 쏟아부어 섞고 공산품인 유부에 밥을 채워 넣었다. 유부초밥의 밥은 대략 어른 숟가락으로 두 숟갈 정도 들어가는 것 같다. 생각보다 많은 양인데 도시락의 빈 공간을 견디지 못하는 나는 겸에게 여섯 개의 유부초밥을 넣어줬다. 배부르면 남겨 오겠거니 싶었다.


겸을 배웅하고 아침을 차렸다. 어머님께서 맛있다며 웃으시는 모습이 왜 나는 씁쓸할까? 어이구, 못난 개며느리. 나는 어쩔 수 없는 개며느리라고 생각하며 ‘입에 맞으시니 다행이에요, 어머니’라고 멘트를 친다. 오후에 비 예보가 있어서 그런지 하늘이 잔뜩 흐렸다. 선생님이 출발한다는 메시지를 띄워 흐린 날씨지만 아이들 얼굴을 볕 삼아 잘 다녀오시라는 댓글을 남겼다. 그런데 웬걸? 도서관에 출근하려고 나갔더니 찬연한 봄 햇살이 세상을 비추고 있었다. 아, 내 댓글 어쩌나?





오후, 돌아온 겸은 화사한 얼굴로 나를 끌어안으며 말했다.

엄마, 유부초밥 너무 맛있어서 여섯 개 다 먹었어.
그래서 과자랑 과일을 다 못 먹었어!

과일은 그렇다 치고 그렇게 좋아하는 고래밥과 허니 버터 칩 대신 내 유부초밥을 먹었 다니, 이렇게 감격스러울 수가. 이 맛에 아프고 힘들어도 도시락을 싸는 거지. 아마 우리 엄마도 그래서 허리가 아파 끙끙거리고, 힘들어서 인상 팍팍 찌푸려지는 고된 노동을 했나 보다.  지단까지 부치고 열두 가지 속 재료를 준비해 김밥을 싸고 생 유부를 조리며 유부초밥을 만들며 나를 불편하게 만드는 엄마의 감정 표출이 정말 싫었는데. 툴툴거리고 끙끙 앓으며 유부초밥을 만드는 나의 감정들은 몇 십 년 전 우리 엄마의 감정을 만나 그때 그 불편했던 응어리들을 스스륵 풀어 버린다.


다음 주엔 강이 먼 나들이(버스 타고 1시간 가서 점심 먹고 오는 나들이) 가는데, 그땐 뭘 싸 볼까? 벌써 귀찮음과 설렘의 양가감정에 몸부림치는 나는 영락없는 엄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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