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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글이 May 07. 2023

바쁘다, 5월

그래서 우리는 어느 날에 끼면 되나요?

강을 재우며 옆에 누워있다가 깜빡 잠이 든 모양이다. 적당히 따뜻한 온도 속에서 몸이 눅진하게 이불에 눌어붙어 버렸다. 사지가 늘어질 데로 늘어진 몸을 일으키기 힘들어 이대로 잠을 잘까 싶었지만 이내 해야 할 일들이 머릿속을 스치니 쉬 눈을 감을 수가 없다.  


내 영혼이 담긴 육신을 무엇으로 꼬셔볼까. 할 일들을 앞세워 다그쳐 봤자 되려 잠들어 버릴 것이 뻔했다. 원래 인간이란 존재가 하라면 하기 싫고 하지 말라고 하면 더 하고 싶은 디비 쪼는 존재 아닌가.


일단 졸린 머리를 깨우기 위해 오늘 쓸 글의 첫 문장을 떠올려 보았다.


‘음.. 5월 5일 어린이날과 5월 8일 어버이날이 3일 상간으로 있으니 가계 경제에 부담이 크다고 쓸까? 나도 아직 어린이라고 쓸까? 아니, 나도 어버이라고 써야 하나? 우리는 누가 챙겨주냐고 쓸까?’

새해가 밝자 기다리던 어린이 날 아침.
양가 어른들 모신 어버이 날.

잠결에 하는 생각들은 정말 진심이고  원초적이다. 내게 이런 쪼잔한 면이 있구나 싶어 정신이 퍼뜩 든다. 아무도 내 생각을 들은 사람이 없는데 왜 누군가에게 들킨 것처럼 얼굴이 화끈거릴까. 혼자 머릿속으로 한 생각만으로 이렇게 부끄러움을 떠안다니 스스로가 애잔하다.


의도하지 않았지만 원초적인 나의 생각들은 얼굴을 화끈거리게 해 주고 가슴을 두근거리게 만들어 머리를 맑게 만들어 버렸다. 그런데 내 사지는 어디로 가버린 거지? 이미 흐물흐물 녹아내린 것 같다. 큰일이다. 오늘까지 써서 넘기기로 한 강의 후기는 아직 초안도 못 썼는데.


갑자기 무언가가 스쳐 지나갔다. 비누가 떨어져 사러 나간 마트에서 사 온 시원한 병 두 개. 양팔에 품어 행복하게 해 주던 그 병들. 1000억 마리 유산균이 들어 있어 요구르트와 비슷한 맛이 나는 뽀얀 액체. 특유의 숙취도 향도 없이 달큼한 탑노트와 떫은 미들 노트를 거쳐 살짝 쓴 베이스 노트를 가진 어여쁜 막걸리 두 병이 생각났다. 세상에서 사라진 것 같던 내 팔다리가 막걸리 마시러 나가자며 나를 일으킨다.

네 덕분이야!


시원한 막걸리가 식도를 타고 내려가 내가 되니 잠이 깬다. 3일 동안 어린이 섬기고 어른 섬기느라 피곤하고 억울했던 원초적인 마음도 함께 깬다. 어느 날에도 끼지 못 한 채 어린이와 어버이라는 주연들을 빛나게 해 주느라 애쓴 모든 3040들을 떠올리며 건배사를 외친다.


"이게 사는 거지."


당장 다음 주말은 친정아버지 생신이고 아이들은 크리스마스를 기다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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