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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글이 May 11. 2023

꿈과 현실 사이, 예의를 놓다

그리고 엄마 남서영의 꿈은 권리임을 주장한다.

카톡 일정이 울린다. 5월 10일 다섯 시, 내가 터전 (둘째가 다니는 어린이집) 방 청소 당번이라는 일정. 이상하다, 그럴 리가 없는데 왜 하필 수요일에 신청했을까? 신청할 때 의욕에 넘쳐 또 잊고 있었던 것이다. 5월까지는 화요일 수요일 저녁 7시, 줌 수업이 있다는 사실 말이다. 화요일은 용하게 피했는데 수요일을 피하지 못했다. 남편은 오늘도 야근이고 방 청소는 5시 이후부터 가능한데 큰 일났다.

진심이야?

일단 터전으로 달려가 강에게 인사를 건네고 청소를 시작한다. 평소라면 여유 있게 가구도 빼고 한 시간 동안 약식 대청소를 하는데 그럴 시간이 없으므로 바닥 청소에만 집중 한다. 완연한 봄이긴 한가보다. 땀이 흐른다, 샤워할 시간이 없는데.

이제 겨우 청소기를 돌렸을 뿐인데 시계는 5시 30분. 시간이 점점 나를 옥죄며 흘러가니 눈물이 날 지경이다. 나이 사십 한살이 무슨 꿈을 이루겠다고 이 개고생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는 환멸과 불쌍하다는 연민이 동시에 불타오르며 마음이 부글부글 끓었다. 그 와중에 머리는 이 어려운 심경을 회피하며 '감정은 대상에 대한 배타적 반응'이라는 이야기나 지껄인다. 머리와 마음의 거리가 멀어진 그 틈으로 불현듯 배달 음식에 대한 욕구가 훅 올라왔다. 준비할 필요 없이 아니, 덜어 먹을 필요도 없이 피자나 시켜 먹을까?

하지만 정혜신 선생님이 그랬지 않은가? 인간은 집밥을 차려 먹을 때 자존감을 회복할 수 있다고 말이다. 우리 아이들, 오늘도 밖에서 자신의 본능을 억누르며 많은 정서를 소비하고 오르락내리락하는 자존감으로 지쳐 왔을 텐데. 채워 주고 싶었다, 정성 어린 식탁으로.

남은 날 모든 청소 열심히 할게!

기본적인 청소만 후다닥 끝내고 하원했다. 집에 들어서자마자 강에게 씻을 준비를 부탁하고 얼른 밥솥과 오븐에 불을 댕긴다. 겸이 어제 주문한 어묵탕과 파닭 꼬치가 오늘 저녁 메뉴다. 아마도 한겨울 동네에 오던 어묵 트럭의 메뉴들이 생각났던 모양이다.

바빠서 찍지 못한 오늘의 식탁 대신 봄냄새 그윽한 어떤 날의 우리집 식탁아이들은 엄마가 해준 참나물, 방풍나물이 참 맛있다고 한다.

오븐과 인덕션이 닭꼬치와 밥을 해주는 동안 강을 씻기고 나와보니 6시 30분. 수업 전까지 30분이 남았다. 이제 어묵탕을 끓일 차례다. 평소에 쓰는 해산물 가루와 액젓을 풀어 간단하게 육수를 낸다. 어묵을 넣고 끓는 동안 반찬을 꺼내고 밥을 푸고 내 저녁을 먹는다. 아니, 마신 것 같다.​


겸이 피아노 학원에서 돌아온 시간은 7시. 엄마가 수업 들어가기 전에 얼굴을 봐야 한다며 허겁지겁 급하게 뛰어 들어온다. 급하게 끌어안고 밥상을 뒤로한 채 링크로 접속한다. 엄마와 남서영의 인생을 동시에 살아내고 나니 부글부글 끓어오르던 환멸과 연민이 쾌감으로 바뀐다.​


이렇게 악착같이 해낼 수 있었던 데는 이유가 있다. 바로 얼마 전에 읽은 호원숙 작가님 책에서 만난 엄마 박완서의 이야기. 맏딸 호원숙의 기억에 엄마 박완서는 정갈한 한복을 입고 성미 깔깔한 할머니의 주방 보조를 하면서 틈틈이 책을 읽으셨다고 한다.


언젠가 내 방이 없어서 집중이 안 된다, 글 쓸 시간이 없다며 툴툴댈 때 남편이 타박하며 한 말속에도 박완서님이 있었다. 글이 너무 쓰고 싶어 식구들이 다 잠든 시간, 식탁에 앉아 밤새 글을 쓴 다섯 아이의 엄마 이야기 속에 말이다.


호원숙 작가님의 글 속에서 엄마 박완서는 ‘맛있는 음식 먹는 건 참을 수 있어도 맛없는 음식은 못 먹는다’ 하시며 매 끼니 맛있는 음식을 마련하기 위해 무척 노력하신 분이었는데. 곰곰 생각해 보니 손으로 직접 글을 써야 하던 그 시절 하루 종일 식구들의 밥상을 준비하느라 바삐 놀린 고단한 손으로 쓰고 또 쓰셨을 작가님이 떠오른다.

나는 결국 내 공간과 책상을 만들었다.

작가님의, 꿈과 삶을 대하는 예의 바른 마음을 내 마음에 새겨 넣어 본다. 앞으로 또 이런 일이 생길 때 환멸과 연민이란 양가감정에 불이 붙으면 마음속에 새겨 둔 그 예의가 지켜주길 바라면서 말이다.


꿈과 현실의 삶 사이에 흐르는 촌음조차 규모 있게 쓰며 엄마 남서영과 인간 남서영 사이 균형을 잘 만들어 가고 싶다. 그리고 꿈을 좇는 건 엄마로 사는 내게 사치가 아니라 엄연히 누릴 수 있는 권리임을 오늘도 되뇌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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