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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글이 Jun 05. 2023

실수로 욕을 뱉었어!

마음이 옳지 않아

겸이 물총놀이를 하고 빨갛게 익은 얼굴로 들어왔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홀라당 젖은 걸로 봐서는 아주 재미있게 논 것 같은데 웬일인지 큰 두 눈엔 슬픔이 맺혀 있었다. 평소 집에 들어오면 부리나케 옷 갈아입기 바쁜 녀석이 젖은 옷 그대로 나를 불러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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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일이야?”

기말고사로 마음의 여유가 1도 없는데 엄마를 찾아대니 모성을 쥐어짜 대충 얼굴에 묻혀놓고 겸을 마주한다. 떨리는 목소리로 나를 부르며 안긴다. 아, 척척해.​


“겸아, 이렇게 젖은 채로 있으면 감기 걸려. 일단 옷부터 갈아입자.”

겸을 달래서 옷을 갈아입히고 바닥에 앉아 내 무릎에 앉혔다. 1살이 11살이 되었는데 그때나 지금이나 무릎 위에서 몸을 동그랗게 말고 파고드는 건 여전하다. 33kg의 무게를 버틸 수 있는 내 도가니, 고마워!​


“엄마, 내가 욕을 했어. 씨*이라고. 나도 모르게 했는데 너무 기분이 안 좋아.”

강아지처럼 눈꼬리가 쳐진 겸의 눈이 더없이 처질 때면 귀여움에 자꾸 웃음이 난다. 이 슬프고 진지한 상황에서 나는 왜 이렇게 짓궂기만 한 건지. 내 표정을 감추려 턱밑으로 가만히 끌어안고 등을 쓸었다.​


“욕할 수 있지. 괜찮아. 그래서 친구들이랑 싸웠어?”

누구를 향한 욕은 아니었다고, 그저 불쾌한 기분에 혼잣말로 뱉은 말이었는데 친구들이 다들 깜짝 놀란 얼굴이었다고 말했다. ‘평소에 아이씨도 안 하던 놈이?’ 싶었나 보다.​




언젠가 겸의 친구들이 성당 캠프에서 있었던 일을 이야기한 적이 있다. 계곡에서 물놀이를 하다가 고학년 형이 자기들을 향해 욕을 하는 바람에 기분이 안 좋았다는 이야기였다. 그때 겸은 친구들에게 이렇게 이야기했다. ‘기분 나쁠 필요 없어. 그게 나쁜 말인 줄 아니까 우리는 안 하면 되는 거야.’라고 말이다. 평소에 아빠랑 욕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나눈 겸이 나름대로 세워 둔 자신의 가치관이었다. 그런데 자신의 신념에 반하는 행동을 해버렸으니 스스로 적잖이 혼란스러웠던 것 같다. 펑펑 우는 내내 ”마음이 옳지 않아.”라고 읊조렸다.

좋은 부모는 어떻게 되는 건가요?

부모의 역할이란 게 참 어렵다. 이런 상황에서는 부모의 가치관을 강요하기보다 아이가 직접 경험하고 직면하며 스스로 깨치도록 지켜봐 주어야 한다는데. 어떤 부모도 내 아이가 욕하는 걸 두고 보기만은 어려울 것이다. 나도 믿음으로 지켜봐 주는 것이 힘든 부모 중 하나다. 그럼에도 지금은 좀 참아야 할 때. 나의 어릴 적 경험을 이야기하되 일단 훈육은 배제시키겠다고 스스로를 설득했다.​


”겸이 참 대단하다. 나는 네 나이 때 욕이 나쁜 거라는 생각조차 없었어. 친구들이 하니까 아무 생각 없이 따라 했고 나중에 욕하는 내 모습이 너무 수치스러워서 안 하려고 애쓸 때 정말 힘들었거든. 그런데 지금 겸이는 욕하는 행동이 잘못된 것도 알고 실수한 겸이를 반성할 줄도 알고. 엄마 참 부끄럽다. “

겸은 꺼이꺼이 울면서 내 이야기를 가만 듣더니 욕을 하게 된 사건의 전말을 이야기했다. 친구가 불러서 갔다니 난데없이 수도꼭지 물을 틀어서 겸에게 퍼부었고 차가운 물세례에 당황한 겸은 평소에 쓰는 ‘아이 진짜!‘라는 말 대신 ’씨*‘이 나온 것이라고 했다. 그 말을 뱉은 자신도 들은 친구도 깜짝 놀랐는데 다행히 장난 친 친구가 그런 겸을 이해해 주며 미안하다고 사과했다고 한다. 하지만 겸은 자신의 가치관과 다른 자신의 언행이 무척 혼란스럽고 실망스러웠는지 그 길로 집에 돌아왔고 계속 “마음이 옳지 않아”라고 되뇌며 울었다.​


“아이고, 그 찬물을 갑자기 뒤집어썼으니, 욕이 안 튀어나오는 게 더 이상하다. 얼마나 놀랬으면 욕을 했겠어, 우리 겸이가!! 그런데 네가 평소에 나쁘다고 쓰면 안된다고 생각하던 욕을 네가 했으니 너한테 실망도 하고 이게 나인가 싶어서 혼란스러웠구나! “​


편을 들어주고 마음을 읽어주니 붉어진 눈시울로 나를 빤히 쳐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기회다. “겸아, 괜찮아 괜찮아. 그리고 말이야~”라며 네가 옳지 않다고 생각 드는 일은 하지 않는 게 좋지, 실수한 너를 너무 몰아세우지는 말아, (욕하는 친구들이 너무 많아서 힘들다는 말에) 네 가치관과 맞지 않는 친구는 가까이하지 않아도 괜찮아, 예의는 너를 지켜줘 따위의 훈육을 직렬로 늘어놓았다. 대화가 만족스러웠을까? 하루가 끝날 무렵 배시시 웃으며 잠이 든 겸의 낮은 숨소리가 평온하게 들려온다.

​​



언어의 한계가 곧 자신의 한계라는 말이 있다. 정확한 뜻을 알고 쓰는 언어의 수가 많을수록 지경이 넓혀진다는 뜻으로 끊임없이 배우고 공부하는 삶의 이유가 되어 주는 말이다. 그런데 욕을 쓰면 쓸수록 욕에 대한 시냅스의 장기 기억이 강화되고 욕이 대체해 버린 언어의 시냅스가 퇴화되면서 언어지능이 떨어지게 된다.

벚꽃을 보며 화를 내다니

또한 욕 몇 마디로 희로애락을 표현하게 되면서 감정의 언어는 퇴색된다. 지난봄, 흐드러진 벚꽃을 보며 “*나 예쁘네.”라는 분노에 찬 말 한마디를 뱉고 지나가는 중, 고등학생들을 보며 알 수 있었다. 욕은 세상을 짧은 문장으로 작게 지어버리고 모든 감정을 분노로 만들어 버린다는 것을 말이다.

나는 겸이 몇 마디 욕으로 자신의 세상을 한정짓는 사람이 되지 않기를 바란다. 그러기에는 너무 아까운 아이다. 아니, 세상 모든 아이들이 언어의 한계에 갇혀 갑갑한 세상에 살지 않기를 바란다. 아이들이 건강한 언어로 자신을 마음 껏 표현하며 세상을 향해 나아가길 바란다.

그러기 위해서 어른들이 아이들에게 욕이라는 짐을 덜어줘야 하는데. 이건 단순히 사랑과 정성으로 아이를 잘 키우는 것만으로 해결할 수 있는 일은 아닌 것 같다. 고민스러운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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