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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글이 Jun 16. 2023

망각의 동물

잊어버리기로는 1등입니다

저녁 7시 30분에 회의가 잡혔다는 남편의 이야기를 듣고 마음이 급해졌다. 점심시간부터 세시까지 별일 없다며 함께 점심 먹고 노닥거리고 있었는데. 평소 내가 밥상 차리는 것에 대해 미안해하는 남편인데 요즘은 야근이 있는 날이면 저녁을 먹으러 집에 들르겠다는 말을 종종 한다. 나는 ‘네가 지은 밥이라도 먹어야 기운 나서 야근하겠다’는  말로 들려 반갑다.

햇살 좋은 날 차양 아래서 남편과 누린 브런치

강이를 평소보다 일찍 하원시켜 부리나케 한살림으로 갔다. 자기가 하고 싶은 놀이를 미처 끝내지 못해 어린이집에서 드러누웠다 질질 끌려 나온 강을 위해 쮸쮸바도 하나 사주고. 계란 15알, 콩나물, 숙주, 애호박, 마늘, 여기에 강이 좋아하는 증편 하나까지. 32,000원어치 저녁 장을 봐 주차장으로 향했다.


급히 나오느라 장바구니를 잊은 나는 강이 가방에 넣을 수 있는 것들을 꾸역꾸역 넣어 지퍼를 잠그고 운전석에 탔다. 도시락 싸들고 나들이를 자주 가는 우리 어린이집 특성에 맞는 가방은 내 장바구니로도 안성맞춤이다.


최대한 신호의 방해를 받지 않는 길을 머릿속으로 헤아리며 서둘러 집으로 향했다. 모든 초등학교 앞을 지나고 마침내 왕복 12차선 도로 초입에서 좌회전 신호를 기다릴 때였다. 경적 소리에 고개를 돌려 옆을 보니 어떤 운전자가 창문을 내려보라고 한다. 무슨 일인가, 하며 창문을 내리니 뭐라고 한다. 네? 하고 되물었더니 위를 가리키며 계란 어쩌고 한다.


차 지붕 위에 계란이 있어요.


그러니까 그 말인 즉, 내가 계란 15알을 뒷좌석 차 지붕 위에 올려둔 채 여기까지 달려왔다는 말인데.


당황한 미소로 감사를 전하며 비상 깜빡이를 켜고 기어를 P로 바꾸고 핸드브레이크를 당겼다. 아이고, 계란아, 너 왜 거기 있니? 용케 붙어 왔구나, 안 그랬으면 저녁이고 나발이고 세차각이었는데. 하며 둥지 속 새알 모시듯 고이 실어 집에 왔다.

오늘의 주인공 계란찜

6시 30분즘 도착한 남편은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뜨거운 계란찜과 얼음 동동 띄운 차가운 오이냉국, 담백하고 부드러운 고등어구이와 칼칼한 콩나물무침으로 고봉밥을 게눈 감추듯 먹었다. 그 옆에 앉은 나는 좀 아까 계란 15알의 기적에 대해 이야기를 했는데 강이 맞은편에 앉아선 엄마, 정신 좀 차리고 살아,라고 핀잔을 준다. 얼씨구, 일곱 살이라고 이런 말도 하네?

비린내는 비누 설거지를 해야 소취된다.

약속된 회의 시간 때문에 일어서는 남편을 배웅하고 돌아섰는데 싱크대에 쌓인 설거지거리를 보니 아차 싶었다. 계란과 고등어의 비린내는 비누 설거지 후 주방 세제 설거지를 다시 해야 한다는 사실을 차리는 동안엔 잊어버린 것이다. 아무래도 나의 망각 곡선은 H.Ebbinghaus의 이론보다 훨씬 더 급한 경사로 떨어지나 보다. 아니, 떨어질 선이 있기는 한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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