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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글이 Jun 22. 2023

그 때나 지금이나

결말은 반전이 없다.

새까만 재가 된 기분을 아는가? 후, 불면 공중으로 사라지는 한 줌 재 말이다. 내가 오늘 그 한 줌의 재가 되어버렸다. 언제부터였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절대적인 시간이 부족해 바쁘다고 소리를 지르며 살았었는데, 올해 상반기가 거의 다 지나간 6월 중순에 이르니 나는 한 줌의 재가 되어 있다. 콧바람 한 번이면 사라지는 존재가 되고 나니 숨은 쉬어도 되나 싶을 정도다.


평생 글 쓰는 재미로 살았다. 인간이 아닌 수험생인 시절 수능의 압박도 친구들과 주고받은 편지로 교환일기로 버티던 아이였다. 난 타고난 글쟁이라고 생각했다. 숨 가쁜 모든 순간에도 글은 꼭 썼으니까. 그런데 오늘은 글 쓰는 일이 하늘을 나는 게 꿈이라고 퍼덕거리며 발버둥 치는 닭처럼 꼴 사나워 보인다.

많이 아팠는데 배가고파서 더 힘들었던 강

시험기간에 우여곡절이 참 많았다. 둘째가 원인 없이 계속 토를 해 댔으니까. 가뜩이나 체중 미달로 영유아 검진 때마다 잔소리를 한 바가지씩 받아오는데 아무것도 먹지 못 한 채 계속 속을 비워내는 걸 받아 내며 참 심란했다. 연휴 동안 바짝 책들을 훑어보겠다며 남편에게 연차까지 부탁했는데 내 계획에 비소를 지으며 삶은 혹독한 시련을 숙제처럼 내주었다. 무언가 먹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아서 병원을 전전하며 길바닥에 시간을 쏟았다. 요즘 소아과는 오픈런을 하지 않으면 당일 진료는 힘들다. 그래서 한 번은 실패하고 두 번째 때 점심시간 오픈런에 엄마들에게 인기가 덜한 병원을 겨우 다녀왔다. 그래도 어수선하고 강퍅한 시간을 화 없이 버틸 수 있었던 건 짬을 내며 글을 썼던 덕분이었다. 잠깐이나마 침잠하여 짧은 글을 쓰고 나면 불이 떨어진 발등은 뜨거웠지만 내 옷과 바닥 위로 쏟아진 토를 짜증 없이 치울 수 있었고 깜깜한 허공이 빛으로 차오르는 시간까지 공부할 수 있었다.


수업 시간에 꼼꼼하게 듣는다고 노력했지만 처음 보는 것 같은 내용이 많아 간이 쑥 빠지는 느낌에 울컥할 때도 있었다. 물론 평소에 복습을 꼼꼼히 했다면 좋았을 테지만 아이 둘을 돌보고 시어머님을 모시고 강도 높은 자격증 준비 과정을 함께 병행하다 보니 그럴 여유가 없었다고 스스로 다독이며 하나하나 짚어 보았다. 일과 학업을 병행하는 분들도 분명 계실 텐데 ‘저도 주육야독, 주독야독하며 아등바등 살았어요.’라고 세상에 변명하고 싶었다. 열심히 하지 않았다는 비난에 진심으로 화낼 수 있을 만큼 손에 쥔 모든 일들을 해내며 악착같이 살았으니까.

내 최선의 흔적들

빚을 내어 쓰면 갚아야 하는 건 돈뿐인 줄 알았는데 당겨 쓴 밤의 시간도 갚아야 했다. 기말고사, 어린이집 단오 잔치, 도서관의 책 전시를 끝내고 나니 쉴 새 없이 몰아치는 잠은 기면증 환자처럼 수면을 불렀고 잠을 잘 수 없는 상황이면 감정은 널 뛰듯 오르내렸다. 결국 이성을 놓쳤고 망각은 빛의 속도로 찾아들어 계란 15알을 차 지붕 위에 올려놓고 신나게 달리는 퍼포먼스도 펼쳤다. 낮동안 쏟아졌던 졸음의 양이 어마어마했기에 밤이 되면 단잠을 기대했지만 막상 잠이 들면 공황처럼 숨이 막혀 벌떡 벌떡 일어나게 되었다. 가쁜 숨을 몰아 쉬어야 했고 원인불명의 두려움은 남편의 다독임이 있어야 진정할 수 있었다.


촛농처럼 흘러내리는 눈을 부릅뜨고 재가 되어 가는 마음을 움켜쥐며 어떻게든 버텼던 힘은 그래도 글을 썼기 때문이었고 날밤을 새어가며 치렀던 시험 때문이었다. 제본한 교안의 페이지 수가 600쪽을 넘어가는 방대한 분량의 여섯 과목이었지만 최선을 다했다는 생각이 있었으니 좋은 결과를 내심 기대하고 있었다. 하지만 오늘 오전에 확인한 결과는 예상과 달리 오답이 없는 과목이 하나도 없었다.

한 과목 남은 날 홀가분한 마음으로 즐겼던 이가의 랠리

그래도 다섯 과목을 열 때까지는 기분이 괜찮았다. 한두 개 틀리는 건 소위 말하는 킬러 문항으로 난이도 조절을 위했던 문제라고 위로할 수 있었으니까. 심지어 마지막 날 프랑스 테니스 오픈 롤랑가르스 여자 결승전을 보고 대충 공부한 과목은 하나만 틀려 의기양양해졌다. 그런데 마지막 과목의 오답을 확인하고는 그만 불이 덴 비닐처럼 마음이 오그라들고 말았다. 몇 번을 들어가 확인해도 바뀌지 않는 수많은 오답들. 학기 중에 치렀던 퀴즈에서 오답률이 제일 낮았던 과목이었고 재미있어서 더 열심히 공부한 과목이라 자신이 있었는데 과신이었나 보다.

어제 저녁 무지개가 떠서 좋은 일이 있을꺼라 믿었던 바보

최선을 다해도 망할 때가 있다. 그걸 모르는 나이는 아닌데 편입 첫 해 첫 학기에 불맛을 알아버리니 다음 학기가 겁이 나기 시작한다. 이미 나온 결과는 담담하게 받아들여야 하는데 어릴 때나 지금이나 그건 참 어려운 일이다. 그때도 글을 써서 지금도 쓸 수 있다고, 그런 나를 참 좋아했었는데.


지금은 그때도 글을 써서 망했고 지금도 글을 써서 망했다고 후회가 몰려온다. 울적하게 앉아 있으니 학교 갔다 돌아온 겸이 내 눈앞에 손을 휘휘 저어댔다. 망한 시험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지 않아 시험 기간을 핑계로 한 발 물러나 있었던 고전 읽기 모임의 지정책 <제인 에어>를 오랜만에 펼쳤다. 하필 첫 문장이 뼈를 때린다.

“실수하도록 유혹당할 때면 후회를 두려워하시오, 에어 선생. 후회야말로 삶의 독이요.”
- 제인에어 중에서-

독에 닿아 홀딱 탄 재가 된 주제에 또 닭처럼 꾸역꾸역 쓰고 있다. 이유는 반성문을 남겨야 다음 학기엔 실수하지 않을 것 같아서다.

잘못 연습해서 두 개 맞춘 날 1학년 겸은 칸을 다 채웠다며 뿌듯해 했다.

아들에게 한 과목이 여덟 개 틀렸다고 말하면 엄마, 괜찮아 나 받아쓰기 두 개 맞춘 적도 있잖아 하고 위로해 줄 것 같다. 다행히 그날 우리는 두 개 맞춘 기념 파티를 열었다. 혼냈으면 고개도 못 들 뻔했다. 돌고 도는 게 인생이라더니 이런 일을 두고 하는 말인가 보다.


시험기간엔 무슨 일이 있어도 절필하고 촌음을 아껴야 하겠다. 애 둘 낳고 여름 바람에도 뼈가 시린 이 나이에 엉덩이 뼈가 으스러지도록 앉아 있은 보람도 없이 빨간 비 내리는 시험지가 눈앞에 아른거려 스스로에게도 면목없는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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