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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세이 매거진 May 14. 2019

내 인생의 수비니어

우리의 추억을 머금은 간결한 디자인의 사물들


기억을 간직하는 방법은 다양합니다. 기념품은 아무리 작고 소박한 물건일지라도 소중한 추억을 환기해내는 강력한 매개체가 됩니다. 다시 꺼내 보았을 때, 마치 오래된 회화 속의 알레고리처럼 우리의 추억을 상징하며 과거의 장면을 안개처럼 뿌려 놓기도 하죠. 이렇듯 수비니어는 어느 사치품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소중한 가치를 지녔습니다. 군더기기 없는 디자인이라면 더욱 좋겠지요. 서로 다른 분야에 종사하는 컨트리뷰터들이 각자만의 고유한 기억을 머금은 물건을 꺼냈습니다.


VOGEL | RADIO METER

김원(포토그래퍼)

"한 영화를 감명 깊게 보고 간직하게 된 물건이다. 이것은 빛을 받으면 유리구 안의 쇠붙이가 회전한다. 위, 아래의 회전 방향이 반대이다. 돌고 돌아도 결국 만날 수 없는 관계인 셈이다. 바로 옆에 있음에도, 자연스럽게 흘러가고 있다고 생각하는 그 상황이 상대에게는 반대로 흘러가는 것일 수 있다. 누군가의 처음이 누군가에겐 마지막이듯. 영화 <나는 내일, 어제의 너와 만난다>를 이것만큼 잘 표현해주는 물건이 있을까. 비록 소품 가게에서 잠깐 노출되는 오리지널 장식품은 유리구가 하나였지만, 개인적으로는 이것이 더 마음에 와 닿는다."


MAISON MARTIN MARGIELA | (untitled)

정진욱(<에세이 매거진> 편집장)

"꼭 눈에 보이는 것만이 과거를 소환하는 건 아니다. 우리말로 기분 좋은 냄새와 과거를 그리워하는 마음을 모두 향수라 부르듯, 후각에 조금 더 민감한 사람들은 향기를 기억하고 그리워한다. 추억의 내음을 저장하는 방법도 제각각이다. 가령, 메종 마틴 마르지엘라는 향기에 3번이라는 숫자를 부여했다. 가톨릭 의식에서 전통적으로 사용하는 솔 향을 메인 노트로 하는 이 향수 'untitled'는 지금은 손에 넣기 어렵기에 더욱 아련한 그리움의 심상을 머금고 있다."


SMYTHSON | PANAMA TEXTURED-LEATHER NOTEBOOK

김미혜(한국문화관광연구원 연구원)

“기록. 손을 움직여 글을 남기는 것은 하나의 소일(小一)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작은 일에는 으레, 무심한 정성과 순간의 정신이 깃든다.”


BIC | SLIM LIGHTER(J-CR)

이야호(문예지 <TOYBOX> 편집장)

"간결하고 가볍고 깔끔하고 단정하며 최소한의 제 기능을 산뜻이 수행해버리는 것. 게다가 언제든지 얼마든지 가질 수 있는 것. 그런 것은 흔치 않다. 그 가치는 오래간다. 부담 없는 손들이 많이도 다녀간다."


ECM | KEITH JARRETT KOLN CONCERT

조원용(월간 <재즈피플> 필자)

"선연한 음들이 적잖이 생경했다. 짧은 음악적 경험을 뒤로한 채 혼자 이 앨범을 곱씹었다. 지하철을 타며 오고 가는 시간 속에 청취의 흔적은 쌓이고, 그 과정에서 형언하기 어려운 계기들을 맞이하며 1975년 쾰른에서의 이야기가 조금씩 이해되기 시작했다. 물론 이 이해는 지극히 개인적인 차원에서 그칠 뿐, 나의 이해는 타인의 그것까지 납득시킬만한 여력도 능력도 없었다. 하지만 그렇기에 언젠가는 꼭 얘기하고 싶었다. 한계를 극복하고 상승하는 멜로디들, 그리고 겨울 아침의 하늘과 이토록 궤를 같이 하는 음악을. 또 아주 가끔 이 앨범을 눈 감고 들으면 눈앞의 검은 백지가 청감에 집중하게 만들어 준다는 사실도 말이다. 44년 전 겨울에 울린 피아노 소리가 아직도 많은 사람들의 귓속에서 공명하고 있다는 건 앨범의 가치를 스스로 증명한 것일 터. 흑과 백으로 이루어진 이 명료한 앨범의 모양새에서 정신적인 완고함과 혼연한 자세를 발견할 수 있다. 비가시적인 부분을 채움으로서 가시적인 부분의 군더더기를 완전히 배제한 쾰른 콘서트. 분명 인생을 갈무리할 때 가장 중요한 서랍 안에 넣어 갈 기념품일 것이다."


ILFORD | PH5

Roman Permiakov(포토그래퍼)

"현재까지도 아날로그 사진가에게 꾸준히 사랑받고 있는 ILFORD HP5라는 필름. 이 변치 않는 인기의 원인은 바로 ‘융통성’이다. HP5의 박스 스피드는 ISO 400이지만, ISO 3200까지 증감을 해도 높은 선명도와 대비, 그리고 섬세하면서도 뚜렷한 그레인을 선보인다. 쉽게 말하자면, 어둑하고 무디한 실내 사진부터 찬란하고 채도 높은 풍경까지, 다양한 환경에서 원하는 결과를 보장할 수 있는 필름이다."


THE | COASTER

김종소리(물질과비물질 디자이너)

"봉투를 열어 코스터를 꺼내는 순간 알 수 있다. 왜 반짝이는 하얀 타일 조각을 거친 크라프트지로 감쌌는지."



소중한 코멘터리를 제공해 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에디터 정진욱 Chung Jinwook

사진 김원 Leobin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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