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잇길

수많은 사잇길에서 인간은 새로운 길을 찾아 발자국을 남기기 때문이다.

by 이종화

직장은 서랍장이었다. 개개인은 어느 서랍에 배속되었고, 거기서 소속감을 생산하고 그걸 소비하면서 아래 칸에서 위 칸으로 차례차례 올라갔다.
그곳에는 빨간 깃발을 든 사람과 파란 깃발을 든 사람이 있었다. 두 상사는 각자의 깃발 아래 사람들을 모으기에 여념이 없었다. 자기랑 함께 저 언덕 위로 오르자며 술잔을 높이 들었다.
사람들은 이 깃발과 저 깃발 사이를 분주히 오갔다. 어제는 빨간 깃발 아래에 있던 사람들이, 오늘은 파란 깃발 근처에서 서성였다. 그게 세상이었다. 군중이 깃발 사이를 오락가락하면서 일으킨 자욱한 흙먼지가 걷히면, 제자리걸음만 하는 두 무리의 사람들이 보였다. 서랍장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가지런히 닫혀있었다. 모든 파란과 그것이 일으킨 소음은 저 서랍 속에 굳게 갇혔다.
오래전엔 저 빨강과 파랑이 온통 파당과 계파로만 보였다. 그렇지만 서랍장 속에서 오랫동안 지내다 보니, 빨강과 파랑은 내 삶에 놓인 ‘두 갈래 길’이기도 했음을 알게 된다. 빨강과 파랑은 지성과 감성, 금전과 시간, 이기심과 봉사심, 그리고 성장과 안정으로 내 마음속에서 뭉게뭉게 피어올랐다.
종종걸음으로 출근하며 시작한 서랍장 속 하루가 쌓여 어느덧 20년이 되어간다. 그동안 나는 그저 하늘에 떠도는 구름을 잡으려고만 했을 뿐, 구름 조각이 수놓인 저 푸른 하늘은 보지 못했다. 언덕 위로 올라가면 하늘이 잘 보일 것만 같았지만, 실은 바람이 닿는 곳 어디라도 하늘은 보였다.
서랍장 안 사람들은 5대 5를 좋아했다.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균형 잡힌 선택, 안정감도 있지만 양쪽을 혼합한 선택을 두고 절묘하고 이상적이라 했다. 그렇지만 내가 목격한 5대 5는 대개 이도 저도 아닌 미봉책이었다. 빨간 콩과 파란 콩을 절반씩 한 포대에 섞은 뒤, 하나를 주고 하나를 받았다면서 이게 절충이라고 우겼다.
이렇게 반씩 섞으면 뭐든 적당히 될 것 같지만, 삶은 결코 그렇게 간단하지 않았다. 프로스트(R. Frost)는 노란 숲속 두 갈래 길에서 사람들이 덜 걸어간 길을 택했고, 그것이 모든 것을 바꾸어 놓았다고 노래했다. 이 멋진 시는 내 인생과 딱 들어맞는 것 같았다. 하지만 운명이 허락한 나의 생을 한참 걷다 보면 가보지 않았던 그 길과 다시 만나곤 했다. 나를 그곳으로 이끈 건 다름 아닌 ‘사잇길’이었다.
사잇길은 잘 보이지 않는다. 보는 게 아니라 그냥 느끼는 것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걸 찾았다는 그 느낌조차 내 부질없는 착각이기도 했다. 사잇길은 5대 5의 조합이 아니었다. 절충한답시고 절반씩 섞어본들 달라지는 건 없었다.
젊은 날, 빨강과 파랑의 두 갈래길에서 어느 한쪽을 선택할 때면 가보지 않은 길을 못내 아쉬워했건만, 사잇길을 발견하고 그 길에서 다시 새로운 사잇길로 들어서다 보면, 그때 놓쳤던 그 길이 내 앞에 반갑게 펼쳐지곤 했다.
사잇길이 생기는 건 빨강과 파랑이 대립하기 때문이고, 그 대립이 공고한 건 하루에도 수없이 변덕을 일으키며 허방을 짚는 인간들의 나약한 선택 때문이다. 살아있는 한, 번뇌하고 방황하는 인간은 부질없는 삶을 살다 가지만 그들이 남긴 삶의 궤적은 빨강과 파랑을 단단히 결속시키고 있었다.
회사에 입사하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나에게 저 바람의 언덕을 함께 오르자던 그 사람이 떠오른다. 그의 깃발 아래 있으면 어쩐지 든든했고 가슴이 뛰었다. 그런데 이제 알 것도 같다. 그때 그 역시 알고 있었을 것이다. 저 언덕에 올라본들 바람 한 푼 더 불지 않는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는 그냥 꿈을 주고 싶었던 것이다.
인생의 두 갈래길. 어느 한쪽을 선택했다고 다른 한쪽을 영영 만나지 못하는 건 아니었다. 길은 곧게 뻗어가는 것 같지만 길과 길 사이에 놓인 수많은 사잇길에서 인간은 새로운 길을 찾아 발자국을 남기고 또 남기기 때문이다. 출발점으로 되돌아갈 수는 없지만 내가 택하지 않았던 그 길로부터 이어졌을 새로운 길을 마주하면서, 오늘도 나는 꿈을 꾼다.

Essay Club/ 이종화 作


(계간수필 2025년 봄호)


* 표지 그림: 앤디 워홀(Andy Warhol)의 「Gold Shoe (To Julie Andr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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