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와 3분의 1

클라이맥스를 뒤쪽에 둘수록 인생은 소신껏 살 수 없을 것 같다.

by 이종화

그래, 삼세번이야. 3은 통합의 숫자, 완전수라 여겨진다. 그리스 신화에서 운명의 여신은 셋, 단군 신화엔 삼신이 등장한다. 성경에서도 삼위일체가 교리의 근간. 예수도 사흘 만에 부활했다. 헤겔의 변증법은 정반합(正反合), 뒤마(A. Dumas)의 《삼총사》, 그리고 넘어지지 않는 세발자전거. ‘3’은 안정의 숫자, 그리고 완성을 의미했다.
우리는 평생 인생이란 삼각형을 오른다. 3이라는 꼭짓점을 향해 돌을 메고 가파른 산을 오르는 것이다. 그래서 3은 삶의 정점이자 이상, 우리의 꿈. 2와 3분의 1은 3을 향해 나아가는 여정, 꼭대기를 꿈꾸는 깃발의 기항지(寄港地)일지 모른다.
나도 봉우리만 보고 산을 올랐다. 나의 어린 시절과 청춘은 경쟁과 포기의 시간. 지금은 야망도 불쑥 끼어들었다. 누구나 최고봉을 꿈꾼다. 그러나 최고가 꼭 드러나란 법은 없다. 최고는 스스로 최고라 말하지 않고, 최고는 최고로 보이는 산봉우리 아래에서 자신의 내공(內功)을 숨기고 있기 때문이다.
《인왕제색(霽色)도》는 그냥 바위가 아니라 비에 젖은 바위를 그린 것이라 특별하다. 바위가 뿜는 강렬함은 인왕산 허리께 기신기신 깔린 안개, 그 안개마저 여백으로 남겨버린 겸재의 무위(無爲)에서 나온다. 창덕궁 비원(祕苑). 그 절경의 비밀도 그곳에 당도하기 위해 꼭 넘어야 하는 야트막한 언덕배기에 있다. 심심한 오르막을 막 넘으려는 순간, 눈 아래 펼쳐지는 비경에 사람들은 작은 탄성을 지른다. 등을 일으키려다 말고 살짝 엎드린 이 거북이 모양의 언덕이 수백 년 동안 왜 이런 자세로 엉거주춤인지 난 알게 되었다. 정점은 삐죽 솟은 봉우리가 아니라 그 아래 겸손히 산을 떠받친 평범한 풍경(風景) 속에 있다는 걸.
조지훈의 〈승무(僧舞)〉는 한 마디로 ‘나빌레라’지만, 정작 백미는 바로 그 구절 앞에서 나비의 날갯짓을 서글프게 만든 ‘아롱질 듯 두 방울’의 은은함에 있다. 정지용의 걸작 〈향수(鄕愁)〉에는 ‘사철 발 벗은 아내’가 클라이맥스 직전 등장해 꿈에도 잊힐 리 없는 유년의 추억에, 고단한 중년의 숨결까지 불어 넣는다. 윤동주의 〈서시(序詩)〉는 아예 보이지도 않는 봉우리를 시 전체가 떠받든다. 그래서 더 맑고 순수하다.
직장인들은 정점에 오르기 위해 매일을 산다. 삼십 년이란 세월을 오직 그 순간을 위해 짓이겨 넣는 것도 같다. 은퇴한 선배들의 직장 생활을 돌이켜 보면, 그들의 정점은 꼭짓점이 아니라 아마도 2와 3분의 1지점이었던 것 같다. 그때 그들은 지혜로웠고 열정도 넘쳤고 재량도 있었다. 실무에서 두어 발 멀어졌어도 직원들 고충만큼은 또렷이 기억하는 시절. 그러면서도 윗사람의 나팔수가 아닌, 위아래의 눈과 귀가 두루 되고자 했던 그 시절이 2와 3분의 1지점이었다. 그 후, 3을 향한 그들 대부분은 점점 다른 사람으로 변모해갔다. 위아래에 맞춰 두세 개 가면들을 번갈아 써가며, 거대한 관료제의 소모품으로 전락하기도 했다.
클라이맥스를 뒤쪽에 둘수록 인생은 소신껏 살 수 없을 것 같다. ‘정점은 3이어야만 한다’라고 고집한다면, 오로지 정점만을 갈망하는 불행한 인생이 되고 말 것이다. 삶을 산다는 것과 일생이란 시간을 보낸다는 것은 분명 다른 의미이다. 정점이 지나면 모든 게 변한다. 늙고 쇠약해진다. 명멸하던 권력이 끝내 소멸하고, 한때의 영화가 낙화처럼 지는 모습도 쓸쓸히 보아야만 한다. 삶의 중심을 어디에 두어야 하는가. 3이 아닌 2와 3분의 1지점에 둔다면, 남은 3분의 2는 유혹에 흔들리지 않고 자신만의 길을 소신껏 걸어갈 수 있을 것이다.
비탈에 앉아 먼 산봉우리를 바라본다. 거기 내 이름을 적는다. 그 옆에 가만히 3을 적었다 지우고, 다시 2와 3분의 1을 적는다. 직장에서의 나는 2에 좀 못 미치는 지점에 와 있다. 내가 꿈꾸는 2와 3분의 1. 그곳을 정점으로 3이란 꼭짓점까지 뚜벅뚜벅 욕심 없이 걸어가 보고 싶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Essay Club/ 이종화 作


(에세이문학 2023년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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