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현궁 호떡

희멀쑥한 호떡을 볼 때마다 덜 여문 젊음을 보는 것 같았다.

by 이종화

노인은 말이 없었다.

그는 팔기 위해서가 아니라 만들기 위해 나온 사람 같았다.

계동과 재동, 그 사이로 난 반듯한 길에 대원군이 살았던 운현궁이 있다. 떡가루 같은 서설瑞雪이 세월처럼 소복이 쌓이는 겨울이면, 담 밖 하얀 수레엔 당장 자리에 누워도 별로 이상할 게 없는 상노인이 생의 여로 끄트머리에 좌판을 펼치고 전설처럼 새하얀 호떡을 굽고 있었다.

이 호떡은 다른 데선 쉬 먹기 힘든 기름기 없는 밀떡이다.

기름을 두르지 않은 팬 위에 반죽을 떼어 부친 뒤 꼬챙이마다 설익은 호떡을 하나씩 꼽아 화덕불 속에 집어넣어 굽는 이른바 직화直火 호떡이다. 만드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리고 여느 호떡보다 크기도 작지만, 쫄깃하고 담백하기로 이만한 것이 없다. 두었다 파는 법 없이, 딱 주문받은 만큼만 굽는 ‘한정판’ 호떡이라 더 맛났다.

겨울마다 나와 노인은 그곳에서 재회했다. 서로 말을 주고받은 적은 없지만 노인은 나를 알아보는 것 같았다. 반가운 표정이 눈빛으로 오가고, 늘 그랬듯 주문한 만큼 호떡을 굽기 시작하는 노인. 밀대로 반죽을 펴고 고명 한 술을 넣은 뒤, 한번은 불 위에서 한번은 불 속에 넣어 솜씨 좋게 호떡 한 장을 굽는다. 불 속에 들어가는 희멀쑥한 호떡을 볼 때마다 덜 여문 젊음을 보는 것 같았다.

호떡이 익었다. 화덕 밖으로 조심스럽게 꼬챙이를 빼내는 노인의 얼굴에 미소가 배었다. 갓 나온 호떡은 바람에 잘 쏘인 뒤에야 건네받을 수 있었다. 찰지기만 하던 반죽이 말랑하면서 바삭거리는 먹음직스런 전병이 되었다. 젊음도 잘 익으면 이리되겠구나. 그렇게 정성스레 만든 호떡이 내 손에 쥐어질 때면 사람들 사이에서 치러야 했던 전쟁 같은 소요마저 잦아들었다.

호떡이 안녕하면 노인도 안녕하신 거다. 겨울이 오면 운현궁으로 나가 노인을 기다렸다. 올해 먹는 이 호떡이 어쩌면 마지막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 때는, 한 입에 울컥했다.

얼음장 같은 공기가 서울을 덮은 어느 겨울, 노인이 보이지 않았다. 시내에 일이 있을 때마다 운현궁으로 갔지만 노인의 호떡차는 오지 않았다. 담에는 근무 중인 경찰만 오들거리며 발을 동동 굴렀다.

그렇게 겨울이 다 가고, 계절은 봄의 문턱을 살며시 넘고 있었다. 날씨도 제법 풀린 2월의 어느 날, 길을 걷다 갑자기 작은 탄성을 질렀다. 궁담 옆에는 그 노인이 아무렇지도 않게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겨우내 얼어붙은 하늘이 살며시 녹아 해와 함께 뉘엿뉘엿 땅으로 꺼져가는 아름다운 오후였다.

멀리 낙원상가의 컴컴한 아랫도리를 무심히 바라보던 노인도 나를 보자 전에 없이 반가운 표정을 지었다.

“…?”

“석 장이요.”

구이판에 두 장의 호떡이 있었지만 노인은 새로 굽기 시작했다. 나는 불 앞에서 몸을 녹였다.

이윽고 하얀 호떡이 나왔다. 노인은 남은 호떡 두 장도 거저 싸주었다.

“가져가.”

“…?”

“나도 그만 가야지.”

“…?”

“가.”

노인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고맙다는 인사를 건넸지만 차마 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잠시 뒤 내 뒤로 가게를 내리는 소리가 났다. 뒤돌아보지 못했다. 계동을 넘어 한 시간을 걸었다. 못 먹은 호떡은 모두 식어버렸다. 밤하늘에 희멀끔 둥근 달이 걸렸다.


이태 전 한국을 떠나왔다. 지금은 가볼 수 없지만 겨울이면 문득 그 노인이 떠오른다. 나보다 나를 더 기다리고 있는 건 아닐까. 돌아가면 운현궁에 꼭 가봐야겠다.


이종화 수필집 《구름옷》 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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