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라하에서 처음 만난 건 여인들의 젖가슴이었다. 넓게 팬 옷으로 코디한 깊은 가슴골들이 따뜻하고 육감적인 걸음을 옮기면, 새들은 새장을 나와 하늘을 날았다.
고독에서 자유로. 희망이 생겼다. 새들이 향한 곳은 언덕 위 프라하 성. 사뿐한 날갯짓이 블타바 강에 잔물결을 일으켜 갈색 도시를 아름답게 수놓았지만 성에 든 새는 한 마리도 없었다. 성벽은 높고 철문은 단단했다. 카프카는 새들의 이런 절망을 담아 『성城』을 썼다. 청마靑馬는 그 애달픔을 「깃발」로 만들어 시단에 꽂았다.
그날도 잔뜩 놀림만 당했다. 친구 소용없다. 방에 틀어박혀 서럽게 우는 나를 아버지가 달랬다. 혼자 있기 싫어 아이들을 따라나섰지만 마음은 여전히 덩그랬다.
잔치의 주인공은 늘 따로 있었다. 군중은 대개 손쉽고 잘나지 않은 배우를 골라 주연으로 세웠다. 주연이 꼭 주인공은 아니었지만, 나는 어느 쪽에도 속하지 못했다.
손을 흔들고 헤어지면 남은 건 빈 가슴뿐. 잔치에 가나 안 가나 쓸쓸하긴 마찬가지였다. 누구든 다를까. 릴케R. M. Rilke가 노래한 건 그런 근원의 고독이었다. 고독하게 태어나 고독을 씹으며 살다 고독에 목이 메어 죽는 것, 사람들은 이걸 더불어 사는 거라 했다.
고독을 달래기 위해 인간은 돈을 쓰고 술을 마신다. 힘을 숭상하고 세를 불리려 줄을 세운다. 무대를 떠날 땐 저 대신 꼭두각시를 주연으로 세웠다. 남을 미워하며 신을 믿고, 사랑하며 배신하고, 두려워하며 질시하고, 함께 누워 다른 꿈을 꾸고, 동물을 키우고 요리를 하고, 책을 읽고 편지를 쓰며, 음악을 듣고 그림을 그리다, 그래도 너무 답답하면 훌쩍 여행도 떠난다. 최고가 되고도 만족하지 못하는 것, 욕망을 꿈이라 착각하는 것 역시 가진 걸 놓으면 또 고독해질까 두려워서다. 오늘도 하룻밤 사랑을 끽연한 엽색꾼의 뒷모습. 그가 휙 던진 꽁초는 타다만 고독이었다.
삶은 고독이란 독배毒杯를 쭉 들이켜는 거였다. 욕망을 채우려 잔을 높이 들지만 고독은 깊어만 갔다. 화장을 고치고 목을 가다듬어도 낯선 시선들 앞에서 새는 노래하지 않았다. 첨탑에서 종이 울리면 새들의 가슴은 뛰었지만 성당은 성 안에 있었다. 욕망의 날개를 활짝 편 새가 사뿐 날아오를 때마다 우린 한 모금씩 독배를 마셨다. 욕망엔 대가가 따랐다.
친구? 소용없었다. 우린 서로의 잔을 대신 마셔줄 순 없기 때문이다. 그래도 사람들은 뭉쳤다. 다 같이 모여 잔을 들고 건배를 한다. 그게 사회였다. 내게 주어진 잔을 끝까지 비우면 한 사람씩 무리에서 사라졌다. 새가 사라진 자리에는 다른 새가 들었다. 그렇게 새들의 견고한 대형은 허물어지지 않고 역사를 써왔다. 성을 향한 영원한 여정, 그게 인간이 걸어온 길이요, 인간은 그걸 종교와 학문, 정치와 경제, 예술과 과학, 전쟁 그리고 평화라 불렀다.
그리움은 미래로부터 오기도 한다. 늦가을 삽상한 바람에 낙엽 하나 노을처럼 가슴에 내리면 고독을 별로 만들어 밤하늘 한 구석 나만 아는 곳에 몰래 숨기곤 했다. 낮에는 무지개, 밤엔 은하수. 찬연한 빛의 향연 어디에도 인연이 보이지 않으면, 고독을 다른 이름으로 저장해 ‘오지 않은 사랑’이라 적었다.
어제 내 가슴을 떠난 새는 지금쯤 어딜 날고 있을까. 산을 넘으면 또 다른 산이 서 있고, 탁 트인 들에는 어김없이 깊은늪이 있었다. 성을 향해 펼쳐진 고독의 세상에서 인간은 끊임없이 흔들렸다. 독이 든 줄 뻔히 알면서도 성으로 가기 위해 연거푸 잔을 들이키면 새의 눈엔 눈물이 맺혔다. 고인 눈물은 샘을 이뤘다.
고독은 그냥 혼자 남겨지는 게 아니었다. 고독의 샘에 몸을 담가야 비로소 껍질을 벗고 나란 실체와 만날 수 있었다. 그 끔찍한 혼자만의 시간 속에서 법식의 틀을 부수고 내 민낯을 꾸밈없이 만난 흔적만이, 생의 공적으로 남았다.
아직 오지 않은 사랑이 오면 과연 고독하지 않을까. 첨탑의 종이 울리는 한, 저 성을 향한 영원한 열망이 식지 않는 한, 이 고독의 독배를 다 비우기 전엔 새는 날기를 멈추지 않을 것이다. 내 안의 새, 그 눈물을 받아 무얼 만들어낼까. 인간의 가치가 훼손되는 시대에 새는 울음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종이 울리면 새는 다시 야윈 날개를 편다. 닿을 수 없는 저 성을 향해 순백의 날개를 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