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청년이 아니긴 하지만요
“나이가 어떻게 되세요?”
누군가 문을 벌컥 열고 들어와 이렇게 물어볼 것만 같다. 그러면 나는 이렇게 대답하겠지.
“저는 청년이 아니긴 하지만요.” 지하철역 앞에 커다란 건물 앞에 서서 간판을 들여다봤다. “청년창업센터” 내가 요즘 일주일에 두세 번 출근하는 곳이다.
청년창업센터로 출근한다. 이런 공간이 있는 줄 몰랐다. 아니 알긴 알았는데 청년들만 이용할 수 있는 줄 알았다. 커다랗게 쓰여있는 간판 ‘남양주 청년 창업 센터’만 보고 그냥 지나쳤다. 사전적 의미의 청년은 신체적, 정신적으로 한창 성장하거나 무르익은 시기에 있는 사람을 뜻한다. 과거에는 10대 후반에서 20대 정도의 나이대에 있는 사람을 말했으나, 수명이 늘어나고 삶의 주기 전체가 길어지면서 현대에는 30대 정도의 나이대에 속하는 남성과 여성을 아우르는 말이 되었다고 한다. 나는 청년의 나이대를 훌쩍 넘었으니 당연히 사용이 안 된다고 생각했다. “언니! 우리도 사용할 수 있대요.” 독서 모임 함께 하는 동생이 공간을 알아보고, 예약이 가능하다며 연락이 왔다. 청년 우대지만, 40, 50대도 가능하다는 것. 오. 막상 가서 이용해 보니 6인 정도 사용할 수 있는 작업실이 있었고, 2인실도 있었다. 건물 꼭대기 층엔 청년들이 창업한 카페, 소품 가게, 베이글 가게가 있었다. 커피를 주문하려고 올라가 보니 내 또래 여자들이 1인용 책상에 앉아 커피를 마시면서 노트북으로 무언가를 작업하고 있었다. 누구나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었는데 왜 지금까지 몰랐을까.
“엄마들도 이런 공간에서 큰 자본 안 들이고 누구나 창업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아? 청년들만 지원해 줄 게 아니라.” 친구가 말한다. 누구보다 자기 일을 하고 싶고, 창업하고 싶은 열망이 많은 엄마들인데. 친구 말에 맞장구를 쳤다. 이곳은 창업 경험 및 자금이 부족한 청년 창업가에게 공간 및 교육 프로그램을 제공하여 청년들이 스스로 자립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곳이었다. 우리는 공유 작업실에서 독서 모임을 하고, 더 큰 세미나실을 빌려 영화 <순수의 시대>도 봤다.
최근에야 2인 작업실을 이용하기 시작했다. 네이버에서 간단하게 예약할 수 있었다. 개인 스터디 용도가 아니라 창업에 관한 작업을 한다면 나이에 상관없이 이용할 수 있다고 한다. 막상 이용해 보니, 개인 작업실처럼 편했다. 책상 두 개, 의자 두 개 딱 필요한 것만 있었지만, 이게 어딘가. 통창으로 밖이 훤하게 보이고 혼자 조용하게 있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 만족스러웠다. 노트북, 책, 노트, 충전기, 커피를 담은 텀블러, 약간의 간식을 챙겨 일주일에 두 번 정도 갔다. 오전 시간은 여유로웠다. 공간을 사용하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하루 4시간까지 이용가능해 글쓰기 특강 자료를 준비하고, 글도 쓰고, 메모도 하면서 4시간을 꽉 채웠다. 방음은 잘 안되어 옆 방에서 누군가 전화하는 소리가 그대로 들리긴 했지만.
함께 독서 모임하는 친구들은 지금 새로운 일을 시작하려 준비 중이다. AI활용 비즈니스, 반려견 수제 간식 창업, 도슨트 수업 등 다들 바쁘다.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찾아 새로운 도전을 하고 있다. 결혼 후 아이 키우느라 경력 단절된 지 거의 20년 가까이 된 친구도 있고, 20년 넘게 회사 다니다가 최근에 퇴사한 친구도 있다. 기대되고 뭔가 할 수 있다는 용기도 생기겠지만, 두려운 마음도 들겠지. 오전 내내 교육받느라 몸도 힘들고, 잘 따라갈 수 있을지 걱정도 많을 거다. 젊었을 때처럼 의지만으로는 되는 게 아니니까. 시간도 시간이지만 급격하게 체력이 떨어지는 게 제일 문제다. 조금만 집중하고 노트북 앞에서 씨름하다 보면 금방 눈이 시큰해지고, 목덜미가 뻣뻣해진다. 종아리는 붓고, 손목은 아프다. 오십견과 관절, 노화 때문에 여기저기 삐거덕 소리가 난다.
“스마트 스토어 수업을 했는데,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모르겠더라. 버벅거리고 있는데 강사는 벌써 뒤로 진도를 확 빼더라고.” 반려견 수제 간식 창업을 준비하는 친구는 여성 새일 센터에서 교육받고 있다. 온라인 창업이라 스마트 스토어 개설하는 교육받는다고 했다. 블로그도 인스타도 SNS랑 친하지 않은데 홍보하려면 필수라고 했단다. 처음으로 인스타를 개설하고 사진 올렸다며 링크를 보내왔다.
교육받는 엄마들 대부분이 새로운 일을 시작하고 싶은 사람들이다. 가계에 보탬도 되면서 좋아하는 일을 찾기란 쉽지 않다. 창업은 사업을 시작하는 일을 뜻하지만, 사업을 시작할 만한 자본도 넉넉지 않다. 이 일이 과연 나에게 맞는 일인가 갈등하기도 한다. 시간과 에너지를 투자한 만큼 소득이 없으면 힘 빠지기도 하고. 그래도 일을 벌이고 또 하고 싶은 일이 생긴다. 지칠 때도 있지만, 지금이 시작하기 가장 빠른 때이니까. 아이들 다 키우면 독립할 거야! 야무진 꿈을 꾸면서 5년 후 모습을 상상하기도 한다. ‘지금 나는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있지.’ 예전에는 시간이 없어서, 돈이 없어서, 아이가 어려서 못 한다고 핑계를 댔던 일들이다. 그런데 이제는 조금씩이라도 해본다. 작은 시도들이 모여 내 삶을 다시 만들어가고 있다는 걸 안다. 완벽하진 않아도 괜찮다. 느려도 괜찮다.
AI 활용 마케팅을 배우고 있는 친구에게 톡이 왔다. 블로그를 다시 정비하라고, 도와준다고 한다. 에세이가주 로고도 다시 만들고, 링크 트리도 세팅해서 한눈에 보기 좋도록. PPT로 브랜드 마케팅 제안서도 보내왔다. 머릿속으로만 생각했던 이미지가 구체화되니 가슴이 두근두근하다. 친구는 꽃과 책을 연결하는 브랜드로, 나는 책과 글로 엄마들의 성장을 도와주는. 블로그 앱에 들어가 배경 이미지를 바꾸고, 메뉴를 다시 변경했다. 뉴스 레터도 발행해야 하고, 특강 기획도 해야 한다. 할 일은 많지만 조급해하지 않기로 했다. 기다린 시간만큼 앞으로도 그렇게 매일 조금씩, 나만의 속도로 나아갈 테니까.
여름이 될 때까지 기다렸다가 천천히 꽃을 피우는 나무가 있다. 배롱나무꽃이다. 7~9월 땡볕에 피는 배롱나무꽃은 한 번 피면 100일 이상 간다고 해서 백일홍(百日紅)이라고 불린다.
“너무 일찍 피는 꽃은 나중에 열매를 맺지 못하더라. 나는 네가 큰 열매를 맺기 위해 조금 천천히 피는 꽃이라고 생각한다. 자랄수록 더 단단해지는 사람 말이야.” 소설가 이순원이 백일장에 나가 상을 못 받았을 때 선생님이 해주신 말씀이란다.
청년은 푸름의 의미를 갖고 있다. 체력은 청년만큼 혈기왕성하진 않지만, 마음만큼은 푸르르다. 도서관에 갔더니 할아버지, 할머니가 돋보기로 신문을, 책을 읽고 있다. 그분들이 나를 본다면 청년이라 하겠지. ‘마음만큼은 나도 청년인데’ 하면서. 오늘따라 청년창업센터에서 작업하는 청년들이 많다. 이어폰을 끼고 노트북 앞에 앉아 혼자서 열중하는 청년들. 나도 그 사이에서 오늘의 할 일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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