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여기 낭만

낭만적 삶에 대하여

by 에세이가주

지금 여기 낭만


아침 딸을 지하철역까지 데려다줄 때마다 운전하며 라디오를 켠다. 입트영을 크게 틀어놓고 들을 때도 있고, 클래식 FM 틀어놓고 멍 때릴 때도 많았다. 요즘 듣는 라디오는 ‘세상을 여는 아침 이영은입니다’이다. 새벽 6시부터 7시까지 한 시간 방송 시간이라 집에서 출발해서 도착할 때까지 내내 듣는다. 차분하면서 통통 튀는 목소리가 오늘 하루도 잘 지내라고 응원해 주는 느낌이라. 문자 메시지로 사연을 받는데 저마다 새벽을 시작하는 풍경이 다르다. 새벽에 일하고 퇴근하며 듣는 사람도 있고, 이른 새벽 지하철 타고 출근하며 듣는 사람도 있다. 나처럼 가족을 데려다주며 듣는 사람도 있다.

오늘은 평소보다 10분 일찍 집에서 출발했더니 길이 막히지 않았다. 보통 워커힐 호텔을 지나며 꽉 막히는데 술술 뚫렸다. 출근하는 차들이 6시가 넘으면서 많아진다. 회사까지 또는 학교까지 가는 동안 어떤 일을 할까 궁금해졌다. 나처럼 라디오를 듣거나 영어 공부를 하거나 팟캐스트 뉴스를 듣거나 하겠지.

오늘 방송의 주제는 그때 그 시절 노래였다. '여름' 하면 생각나는 노래 '쿵따리 샤바라'. 클론 이 노래를 들으면 그때 그 시절이 생각난다. 대학교 4학년 때였나 여름 내내 이 노래가 어디를 가나 흘러나왔다. 흥겹고 따라 부르기 좋아 한동안 들썩였다. 클론이 나와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면 기분도 좋아졌다. 그런데 이게 1996년도 노래라니. 벌써 30년이 됐다는 말인가. 내 나이 든 건 생각도 안 하고 시간이 이렇게나 빨리 흘러갔다는 생각만 든다.

이영은 아나운서는 2012년 대학 신입생이었다고 한다. 그때 유행했던 씨스타의 러빙유, 버스커버스커의 정말로 사랑한다면. 노래를 들려줬는데 나에겐 최신가요처럼 들렸다. 벌써 10년도 더 지난 노래들인데 말이다.




“지원아, 이 노래 엄청 인기 있었어.(쿵따리 샤바라)”

“어. 그런데 옛날 노래 같아.”

헉. 이 엄마는 아직도 들을 때마다 신나는구먼. 딸에게는 옛날 노래처럼 들리다니. 그래도 가끔은 딸도 내가 좋아하는 노래가 좋다고 함께 듣는다. 이문세의 붉은 노래, 브라운아이즈의 벌써 일 년, BMK 꽃 피는 봄이 오면 같은 노래다. 요즘 유행하는 노래가 뭔지 잘 모른다. 가끔 딸이 좋다고 들어보라고 하는 노래를 듣긴 하는데 난 여전히 옛날 감성 노래가 좋다. 가사 하나하나 새겨들었던 그때 그 시절. 워크맨 들고 다니며 이어폰으로 무한 재생했던 노래들. 나에겐 윤상과 조정현이 발라드계의 최고봉이었고, (그 아픔까지 사랑한 거야. 는 무려 1989년 노래!!! 놀랍다) 신승훈의 ‘처음 그 느낌처럼’이 흘러나오면 가슴이 두근두근했었다. 가사까지 마음에 훅 들어오던 노래들. 대학 신입생 때 어딜 가나 흘러나왔던 노래를 들으면 나도 모르게 흥얼흥얼 따라 하게 된다. <최선을 다하면 죽는다>의 작가 황선우, 김하나의 신간이 나왔다는 알림이 떴길래 알라딘에 들어갔더니 책 제목이 <하와이 딜리버리>다. 그녀들이 좋아하는 노래가 365일 날짜별로 나와 있는. 책 소개를 보니 20년 뒤 바닷가에 칵테일 바를 할 때 틀어놓고 싶은 음악 리스트라 한다. 책을 받고 소개해주는 음악을 유튜브로 플레이했다. 나에게도 이런 취향이 있었다면 어떨까 하며 부럽기도 했다.


“엄마, 내가 왜 야구를 좋아하는 줄 알아?”

요즘 야구에 빠진 아들이 집에서 야구 경기를 보다가 묻는다. “왜 좋아하는데?”

“낭만.”

잠시 뜸을 들이다가 이렇게 말한다. “낭만이 뭐라고 생각하는데?” 아들을 보며 다시 물었다.

“어제 한화한테 3;4로 KT가 지고 있었거든. 그런데 KT 강백호가 홈런을 쳐서 역전을 했어. 낭만이 뭐냐면... 음. 잘하고 이기는 팀이 아니라 내가 진짜 좋아하는 팀을 응원해주고 싶은 마음이야.”

KT 위즈 팀을 좋아하는 아들이 웃으며 말한다. 설거지 끝내고 앉아 다이어리에 ‘낭만’이라고 썼다. 나에게 낭만이란 어떤 마음일까 하고.


토요일 오전, 발레필라 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라디오에서 아델의 ‘Make you feel my love’가 흘러나왔다. 볼륨을 높이고 창문을 내렸다. 에어컨을 틀지 않아도 적당히 선선한 바람이 불었다. “When the rain is blowing in your face, And the whole world is on your case, I could offer you a warm embrace. To make you feel my love.”

“비바람이 네 얼굴을 때리고, 세상이 온통 너를 몰아붙일 때, 내가 따뜻한 포옹을 건네줄게, 내 사랑을 느낄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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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이 말한 낭만은 좋아하는 팀을 끝까지 응원하는 마음이었다. 결과를 모르는 상황에서도 마음을 거두지 않는 태도, 함께하는 기쁨을 믿는 마음. 아델의 노래를 종일 틀어놓고 책을 읽고 공저 원고를 검토하고 글을 썼다. 아델의 노래 가사처럼 비바람이 몰아쳐도 따뜻한 포옹을 건네듯, 완벽하진 않지만, 그 안에서 작은 행복을 찾는 마음이 낭만이 아닐까.


알랭 드 보통은 그의 책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에서 “낭만은 완벽한 순간이 아니라, 불완전한 일상 속에서 피어나는 사랑의 노력이다.”라고 말했다. 낭만은 모든 게 완벽하진 않고 불안하고 힘든 일상에서도 작은 기쁨을 하나 찾는 마음이다. 속상하고 불안하고 고통스러운 마음에서도 오늘의 낭만 하나를 찾을 수 있는 마음, 그런 마음을 품고 산다면 어떨까 하고.


좋은 책을 읽고, 좋은 음악을 듣고, 좋은 사람과 사랑하며 사는 삶. 그렇게 멋지게 살고 싶어졌다. 창밖의 풍경, 한 곡의 노래, 아들의 한마디를 놓치지 않고 마음에 담아두는 일이 내겐 낭만이니깐.

빨간 야구 글러브를 끼고 KT유니폼을 입은 아들이 집에서도 계속 공을 던진다. 소파 위 쿠션을 향해 던지다가 거실 창문을 맞혔다. 깨진다고 화를 버럭 냈다. 낭만을 만드는 일에도 노력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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