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 가는 대로, 취향을 알아갑니다

유유자적 미술관

by 에세이가주

“언니, 저 도슨트 시험 합격했어요!”


함께 미술 북클럽을 하는 동생에게 전화가 왔다. 최종 합격했다고. 서울시립미술관 도슨트 양성 과정에 지원하는 것부터 최종 합격까지 옆에서 지켜봤다. 면접 때 이런 질문받았다고 한다.

“<어쩌면 예술일 거야, 우리 일상도> 책을 쓰셨네요. 일상이 예술이 된다는 게 어떤 뜻일까요?”

함께 일상 예술 에세이 공저책을 썼다. 내가 기획하고 코칭한 첫 책이었다. 나를 포함한 열 명의 작가가 각자 느낀 일상 예술 이야기를 쓴 책이다.


미술 북클럽은 5년 전에 만들었다. 미술 전공자는 아니지만 미술책을 읽고 싶은 마음은 있는데 혼자 꾸준히 이어갈 자신은 없어서 시작했다. 온라인에서 미술 북클럽 검색을 했지만, 마땅한 모임이 없었다. 모임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독서 모임에 있는 사람들과도 끈끈해졌다. 이름은 유유자적 미술관. 말 그대로 유유자적하게 읽는 미술책 모임이다. 현재 북클럽에 참여하고 있는 사람들은 열 명이다. 전공자는 한 명도 없다. 하지만 그림을 보는 걸 좋아해서 꾸준히 좋은 전시를 찾아다니는 사람들이다. 미술 애호가. 사랑하는 사람들이다. 생소한 작가나 그림이 나오면 자료도 공유하고, 감상도 나눈다. 느리지만 꾸준하게 좋아하는 그림에 대해 수다를 떤다.


동생과 국립현대미술관에 다녀왔다. “이번 주까지니까 꼭 봐야 해!”라며 동생이 말한 전시는 호주의 예술가 론 뮤익(Ron Mueck) 개인전이었다. 가기 전, 나는 잠깐 인터넷을 뒤졌다. 사실적으로 작품을 묘사한다는 것, 한 작품을 만드는 데 오랜 시간을 들인다는 것 정도. 유튜브에서 큐레이터가 작품을 설명한 영상을 보고 갔다. 생각한 것보다 훨씬 많은 사람이 전시장을 찾았다고 한다.



침대에 누워있는 여자는 전시장을 꽉 채울 듯이 커다란 작품이었다. 한쪽 손으로 얼굴을 감싼 채 무슨 걱정이 있는 사람인 것처럼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자려고 누었지만, 이런저런 생각에 잠이 오지 않는 밤. 혼자 걱정하는 듯한 모습이 낯설지 않았다. 나도 그럴 때가 있지. 장바구니를 들고 아이를 안고 있는 여자의 눈은 앞을 보고 있지만 어딘지 텅 비어 있는 느낌이었다. 마트에 다녀왔는지 두 손에 들고 있는 비닐봉지의 무게가 그녀의 마음 같아 보였다. 가슴에 안은 아가는 그저 그녀의 몸에 달라붙은 사물처럼 덩그러니 매달려 있었다. 먼 곳을 바라보는 멍한 눈빛, 나도 아이들 키울 때 그런 눈으로 하루를 버틴 적이 있었다. 벽에 기대고 있는 사춘기 소녀의 눈빛도 불안해 보였다. 소녀를 보며 내 마음을 잘 표현하지 못했던 어린 시절을 떠올렸다. 말 대신 벽에 등을 기대고, 눈빛으로 세상과 거리 두기를 했던 시간. 아마도 사춘기 딸도 이런 시간을 지나고 있을지도 모른다. 작품을 보며 내 마음을 읽는 시간이었다. 내가 작품을 보는 게 아니라, 작품이 내 마음을 보는 것 같은 순간이었다.


예술가들은 마음을 꿰뚫어 보는 사람들인 것 같다. 예민한 감각으로 활짝 열어 관찰하고 자기만의 방식으로 표현한다. 관람자인 우리는 결국 그런 감정을 이해하려 애쓰는 사람이기도 하다. 감정을 알아차리는 건 내가 어떤 상태인지, 무엇을 원하는 사람인지 알아가는 일이다.


옆 전시장에선 <한국현대미술 하이라이트> 전시가 열리고 있었다. 도슨트 선생님의 설명이 막 시작되던 참이었다. 그림으로만 봤던 박서보, 이응노의 작품이 벽 가득 펼쳐져 있었다. 한국 추상회화, 색과 선의 흐름을 따라가다 보니 마음이 잔잔해졌다. “이 전시가 더 좋지?” 그림도 좋았지만, 도슨트 선생님의 말과 태도가 더 눈에 들어왔다. 그림에 대한 안목이 전시를 더 빛나게 했다. 조곤조곤 대화하듯 말하는 조용한 목소리, 관람하는 사람들에게 눈을 맞추며 이야기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그림에 대한 애정이 느껴졌다. 미술 북클럽에서 만난 화가의 작품을 직접 보니 반가운 마음도 들었다. 사전 정보 없이 그냥 만나 좋아지는 작품이 있지만, 대개는 책에서 함께 읽고 이야기를 나눈 작품들에 더 애착이 갔다.


무작정 하고 싶은 마음이 들어 북클럽을 시작했다. 더 알고 싶고 공부하고 싶은 마음 때문이었다. 처음엔 시작하는 게 두려웠다. 온라인으로 모임을 한다는 게 가능할까? 블로그에 소심하게 글을 올리고, 댓글이 하나도 없을까 봐 마음 졸였다. 미술 전공자도 아니면서 미술 북클럽을 한다고? 다행히 친구들 몇 명, 블로그를 보고 찾아온 이웃 몇 명과 함께 <방구석 미술관 1> 책을 시작으로 1기 미술 북클럽을 시작했다.


취향은 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 방향을 말한다. 하고 싶은 걸 멈추지 않고 꾸준히 계속할 때 나만의 취향이 생긴다. 마음이 원하는 방향에 따라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면 나만의 것이 된다. 예전부터 자기만의 취향이 뚜렷한 사람이 멋있어 보였다. 영화, 드라마, 음악 그리고 책. 좋아하는 장르가 뚜렷해서 하나에 파고드는 사람들. 일명 덕후 생활자들이 부러웠다. 이래도 흥, 저래도 흥 했던 나와는 다른 사람들이었다. 소심하게 시작한 미술 북클럽이 어느새 5년째, 이제는 누군가의 삶을 바꾸는 모임이 되어가고 있다. 동생이 도슨트 합격 소식을 전할 날, 톡 방에선 폭죽이 터졌다. 가을에 첫 도슨트로 전시해설을 하는 날 함께 가서 축하해 주자고 했다. 좋아하는 마음이 생기면 더 알고 싶은 마음이 든다. 그걸 계속하면 나만의 그 무엇을 만들 수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내년엔 국립 현대 미술관 도슨트 과정에 함께 지원하자고 한다. 내가 무슨? 했다가도 한번 도전해보고 싶은 마음도 든다.


“우리 미술 에세이에 도전해 볼까요?”

이제는 읽고 공부하고 이야기 나누는 모임에서 내 감정을 표현하고 말하는 시간을 더 많이 가지고 싶다. 나를 더 잘 알기 위해 좋아하는 걸 계속 이어간다. 새롭게 도전하고 성장하는 일이 나만의 취향을 만들어가는 거라 믿는다. 취향은 원래부터 있었던 게 아니라, 조금씩 다듬고 쌓아가는 태도니까.

유럽미술관 투어도 가자고 한다. 그러려면 영어도, 프랑스어도, 독일어도 배워 두자고 듀오 링고앱을 깔았다. 어쩌면 독일어가 입에서 술술 나올 때가 올지도 모른다.

이전 07화숨차 죽겠는데, 이게 성장이라고? (feat. 런데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