갱년기 말고 성장기
나는 어른일까?
이제 중학교 입학을 앞둔 아이들과 독서 수업했다. 유은실 작가의 <순례 주택>. 들어오자마자 “선생님, 재밌었어요!” 하니 마음이 놓인다.
“순례라는 말의 뜻이 뭘까?” 책 속에 이미 나와 있지만, 순례의 의미를 다시 한번 생각해보고 싶었다. 사전상 의미는 ‘여러 곳을 찾아다니며 방문함’이다.
“다른 곳으로 여행 다니는 거요.”
“한 곳에 있지 않고 계속 떠나는 거요.” 아이들이 말한다.
순례 주택의 주인은 순례 씨이다. 오래전 남편과 이혼하고 혼자 목욕탕에서 세신사 일을 하며 번 돈을 모아 빌라 주인이 되었다. 빌라에 세 들어 사는 사람들에겐 시세보다 훨씬 저렴한 월세를 받고, 옥상 정원과 옥탑방을 자유롭게 들락거리며 이웃 간의 정을 쌓는다. 순례 주택이 있는 거북 마을 반대편에는 원더 그랜디움 아파트가 있다. 화자 오수림이 사는 집이다. 오수림은 중학생으로 엄마, 아빠, 언니 오미림과 함께 산다. 하지만 수림이는 집보다 거북 마을에 있는 순례 주택이 좋다. 태어나서 몇 년을 순례 씨가 키워줬기 때문이다. 엄마의 산후 우울증 '덕분에' 수림이는 가족보다 외할아버지의 여자 친구인 순례 씨와 함께했던 시간을 감사하게 생각한다. 가족에게서 느끼지 못하는 넉넉함, 따뜻함, 타인에 대한 배려, 독립, 자존감 등. 좋은 어른에게서 배울 수 있는 모든 것을 순례 씨 덕분에 알아간다.
순례 씨는 자신의 이름으로 된 건물이 있다. 벌써 기부할 곳도 정해 놓았다. ‘국경 없는 이사회’ 경계와 차별과 편 나누기를 싫어하는 순례 씨다.
수업을 준비하며 ‘순례자’의 뜻을 생각했다. 한 곳에 정착하지 않고 떠나는 사람. 자유로운 사람.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고 훌훌 나아갈 수 있는 사람. 그런 사람이 순례자다. 자유롭다고 해서 목적지가 없는 것은 아니다. 자기만의 생각과 신념이 있다. 저 앞에 가야 할 곳을 향해 천천히 나아간다. 집착과 욕심이 있으면 자유롭지 못하다. 순례 씨처럼 가진 것을 넉넉하게 나눠줄 수 있는 사람 또한 순례자다. 자기를 비워야 가벼워진다. 그래야 떠날 수 있다. 입으로는 ‘자유’를 외치면서 가볍게 살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 나는 가볍게 살고 있나?
일요일 밤 9시 김주환 교수님의 실시간 유튜브 방송을 듣는다. 지금 읽고 있는 책 <내면 소통>에 대한 강의다. 이번 주제는 ‘삶의 우연성’이었다. 삶이 우연인 것을 알아야 가벼워진다고 한다. 고통이 없다고 한다. 우연인 것은 필연이 아니다. 그냥 일어나는 일이다. 필연이라고 생각하면 무거워진다. 앞뒤 관계를 따지고 억지로 이야기 만들어 마음을 괴롭힌다.
삶은 필연이라고 생각하고 살았다. ‘내가 이 말을 했기 때문에 그렇게 반응했고, 또 저 사람이 이런 행동을 했기 때문에 내 마음이 괴롭고.’ 끝이 없다. 끊임없이 나를 괴롭히는 ‘끼워 맞춤’에서 벗어나라고 한다. 차별과 경계 짓는 사람들까지 순례 씨는 포용한다. 억울하고, 밉고, 욱하는 마음을 그냥 흘려보낸다. 움켜잡고 있으면 무거워지기 때문에.
<존재의 참을 수 없는 가벼움> 김주환 교수님은 이렇게 말했다. 존재가 가벼워야 삶이 자유롭다고. 순례 씨는 진정한 어른이기도 하다. ‘자기 힘으로 살려고 애쓰는 사람’을 어른이라 말한다. 두 발로 땅을 단단하게 딛는 사람. 땅을 딛고 뚜벅뚜벅 제힘으로 걸어가는 사람, 그런 사람이 어른이다. 아이들에게 ‘너희는 어떤 어른이 되고 싶어?’라고 물었다. ‘좋아하는 일을 내 힘으로 계속하는 사람’이 어른이란다. 나보다 낫다.
‘나는 어른인가?’
‘나는 순례자인가?’
‘좋아하는 일을 계속하면서 사는 사람’이 어른이라면 나는 어른일까? 돈을 벌지 못하면서 계속 좋아하는 일만 할 수는 없을 것 같았다. <좋아하는 것을 돈으로 바꾸는 법>이란 책도 있지 않은가. 나는 순례 씨처럼 건물을 저렴하게 세를 줄 수 있는 여유도 없고, 다른 사람을 다 품을 수 있는 너른 마음도 부족하니, 아이들 말처럼 좋아하는 일을 내 힘으로 할 수 있는 사람인가가 중요했다. 내 힘으로 남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일도 하고, 돈도 벌 수 있으면 더 좋지 않을까 하는 마음.
자이언트 글쓰기 수업을 듣다가 눈이 번쩍 뜨이는 말을 들었다. 라이팅 코치 과정을 모집한다는 공지였다. 미국에서 한국으로 오기 직전 아이들과 그랜드 캐년을 투어 할 때 오리엔테이션을 했다. 한겨울 눈보라 속에서 종일 걷고 깜깜한 새벽, 줌을 켜고 들었다. 순간 가슴이 두근거렸다. 몇 년을 읽고 끄적이며 ‘이걸 어떻게 일로 연결시킬까’ 고민이 많았던 때였다. 자이언트 글쓰기 수업을 꾸준히 듣고, 공부하고, 읽고 쓴 덕분에 나 같은 엄마들을 도울 수 있는 라이팅 코치가 되었다. 좋아하는 걸 놓치지 않고 계속했기 때문에 기회도 온 거겠지.
돈이 필요한 이유는 자유롭게 살기 위해서다. 순례 씨의 꿈이 ‘지구별 여행자’인 것처럼 나도 가지고 있는 것에 집착하지 않고 언제든 훌훌 떠날 수 있는 자유를 꿈꾼다. 그러기 위해 지금은 좋아하는 일을 계속하는 사람이 되고 싶은 거고.
자기 힘으로 사는 사람은 순례자와 닮았다. 순례자는 길을 떠나면서도 그 여정이 자신을 찾아가는 과정임을 안다. 좋아하는 일을 스스로 해나가는 사람 역시 내면에서 울리는 목소리를 따라가며, 삶의 목적과 의미를 찾아간다. 순례자가 외부의 풍경 속에서 자신을 성찰하듯, 좋아하는 일을 하는 사람도 그 과정 속에서 끊임없이 한계와 가능성을 마주하며 성장한다. 진정한 어른이 된다는 것은 이런 순례자의 길처럼, 삶을 주체적으로 살아가며 스스로의 의미를 찾아가는 여정을 이어가는 것이다. 나는 지금쯤 어느 길 위에 있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