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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한데 뻔하지 않은, 시골 소녀의 상경기

엄마의 집짓기

by 귤껍질


“너희는 서울 아이들이잖아, 그런데 그 당시 지방 출신 아이들은 다 그렇게 살아”




‘엄마의 집짓기'를 출판할 거야,라는 다짐을 한지는 꽤 되었다. '이야기를 한 권의 책으로 엮으려 할 때 빈 곳이 뭘까? 독자들이 더 궁금해할 만한 내용이 뭘까?' 질문해 봤다.


먼저, '엄마의 집짓기'의 주인공인 엄마는 어떤 사람인가, 그 옆에 있는 아빠는 어떤 사람인가 궁금할 것 같았다. 그리고 다음으로는 “나도 건축해보고 싶은데,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정보도 줘!”라고 말할 것 같다. 그래서 순서대로 풀어내 보려고 한다.


먼저, 주인공인 엄마가 거쳐온 공간에 대해 소개하려 한다.




엄마는 어렸을 때, 할아버지 회사에서 나온 사택에서 자랐다. 할아버지는 노조위원장은 노동자를 대변하는 건데, 간부 사택은 적합하지 않다고 마다했다. 그래서 종업원 사택인 무궁화사택, 백마사택 중 무궁화사택에 살았다고 했다. 간부사택에 사는 친구 집에 놀러 간 적이 있었는데, 자신의 방이 있고 좋은 미국 제품들을 가득 가지고 있어서 무척 부러웠다고 했다.


으리으리하지는 않았지만 무궁화사택도 재미있는 집이었다. 당시 일본풍 가옥이 인기였고, 일제에 지어진 것은 아니나 그 느낌을 살린 적상가옥이었다. 다듬이 방이 있었고, 안방에 들어가려면 문을 여러 번 열어야 했다고 했다. 푸세식 화장실이기는 하지만, 화장실이 집 안에 있었다. 당시에는 화장실은 집 밖에 분리되어 두는 게 대부분이라, 특이한 구조였다고 했다.




할아버지가 벌어온 돈이 노조 활동을 위해 쓰이면서, 할머니는 생활비를 위해 신발가게를 운영했다. 그러면서 엄마는 신발가게에 딸린 가겟집에서 잠시 생활했다. 할머니 대신 가게를 보기도 하고, 제품도 고르러 다니면서 장사에 대해 배울 수 있는 시간이었다. 하지만 집 안이 손님에게 훤히 보이는 구조라, 친구들이 신발을 사러 오면 너무 부끄러웠다고 했다.




그 뒤로, 야무지게 서울에 있는 대학에 붙으면서 독립을 하게 되었다. 내내 부모님과 같이 방을 써서, 생에 처음 방을 가지게 된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처음에는 하숙을 했다. 하숙비는 13만 원이었다. 집안 형편에 비싼 가격이었지만, 딸을 혼자 서울로 보낸 부모님이 자취는 걱정이 되어 안된다고 반대했다. 같이 하숙을 한 언니는 의대생이었는데, 시험기간이면 4-5킬로가 빠지면서 하루 종일 해골을 붙잡고 공부했다. 종종 이번 학기도 전액이야, 라며 자랑했다고 하니 장학금을 받았던 것 같다고 했다.


살벌하지만 배울 점이 많았던 의대생 언니와의 동거는 한 학기만에 끝이 났다. 친구랑 돈을 아끼기 위해 오만 원을 나눠서 이만오천 원씩 하는 자취방을 구했다. 부엌도 없고, 공용 화장실에, 방 가운데에 연탄불이 있어 옆방이랑 공유해야 하는 열악한 조건이었다.


엄마는 “진짜 그지 같은 방이었어, 아주머니가 방 하나짜리를 두 개로 쪼갠 거야, 가운데 연탄불을 그쪽 사람과 우리 둘 다 꺼트리지 않고 지켜야 해. 진짜 재미있는 구조였어" 라며 웃었다.




그 뒤로도 자취방을 찾아 여기저기를 돌아다녔는데, 학교에서 이사철에는 리어카릉 빌려줬다고 했다. 그 리어카에 짐을 싣고 서울 여기저기를 다녔다. 엄마 입장에서는 로망 찾아 여기저기 떠돈 건데, 할아버지는 서울 왔다 엄마의 자취방을 보고 서울역에서 발걸음이 안 떨어졌다고 했단다. 아무튼 친구랑 둘이서 야무지게 여기저기 짐을 쌌다 풀었다 했을 생각을 하니, 대견하고 애틋한 기분이 들었다.




한 번은 신림동 반지하에서 자취를 하는 큰오빠와 살아보기도 했다. 그러다가 큰오빠가 결혼을 하고 지방으로 내려가면서, 동기와 지하에 방 두 개가 있는 집을 얻었다. 여기서 처음으로 서울살이가 무서워지는 사건을 경험한다. 밤사이 잠을 깼다가 집안에 들어온 강도를 발견한 거다. 친구가 발견했고, 다음날 확인해보니 부엌의 모기장을 뜯고 선을 집어넣어서 문고리를 돌렸다고 했다. 안식처가 하루아침에 하루도 견딜 수 없는 공포스러운 공간이 되었다. 그 길로 배낭만 매고 몸만 빠져나온 둘은 각각 오빠의 집에 의탁하다가, 따로 집을 얻었다.


그렇게 새로 자리 잡은 화곡동에서 얻은 집도 반지하를 면하지 못했다. 똑같이 방 두 개인 집에서 결혼 전까지 살고, 근처 학교로 발령이 나서 첫 교사 생활도 시작하게 된다.




미대생이었던 엄마는 다작으로 장학금을 받을 정도로 꾸준하고 성실하게 그리는 학생이었다. 그렇게 계속 그려서 방 한구석에 쌓아져 있는 그림들을 주기도 하고, 팔기도 했는데, 그중 하나를 비키니 옷장과 바꿨다. 그 몇 평짜리 자취방에서도 하루 걸러 비키니 옷장의 위치를 바꾸는 등 공간을 꾸미느라 열심이었다고 한다.


"생각해 보면 나는 공간에 대한 특별한 재미를 느끼는 사람이었어, 공간을 가만히 안 뒀던 것 같아"라고 하는 엄마가 퇴직금을 탈탈 털어 직접 집을 지은 거다. 그 결과 집안뿐 아니라 마당이며, 귀퉁이땅까지 360도 전방위적으로 엄마의 손길이 닿고 있다.




서울 아이인 나는, 좀처럼 내가 나고 자란 동네를 떠날 일이 없었다. 물론 타지에서 고생하지 않은 건 무척 감사할 일이다. 또 그게 편하고 좋았지만, 내 공간을 찾아 유랑하는 경험도 꽤나 재미있어 보였다. 엄마와 나는 한 세대가 차이 날 뿐인데, 경험이 이렇게나 다른 것도 신기했다.




다음에는 서울에 자리 잡기 위한 고군분투에 대한 이야기로 돌아올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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