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남과 머무름
누군가 어떤 여행 스타일이냐고 물으면, 우연성이 높은 여행이 좋다고 한다. 여행은 떠나는 것이기도 하지만 낯선 공간에 머무르며 온전히 그 환경이 주는 새로움을 경험해 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새로움은 대게 우연한 만남과 사건에 대한 여지를 많이 줄수록 더 많아진다. 그래서 호텔보다 현지의 분위기를 더 느낄 수 있는 에어비엔비나 게스트하우스를, 현장에서 그 순간의 분위기와 날씨에 따라 달라지는 대화와 상호작용을 만끽할 수 있는 자유여행을 선호한다.
스페인 여행 중 마드리드의 프라도 미술관을 가게 된 건, 스냅사진 작가님과의 만남 덕분이었다. 여행 첫날, 지도 위 별 표시를 해놓은 곳을 따라 마드리드의 이곳저곳을 쏘다니며 아침을 보내고, 간단한 점심을 먹은 뒤 스냅사진을 찍기 위해 정해진 장소로 갔다. 사진을 찍기 위해 도심 곳곳을 함께 돌아다니며 작가님께 마드리드에 오면 꼭 해야 할 것 하나만 알려달라 하니, 미술관이라 하셨다. 이어진 대화 속에서 오후에 프라도 미술관에서 도슨트로도 활동하시는 걸 알게 되어 냅다 신청하고 함께하기로 했다.
약속된 시간에 프라도 미술관 앞에 호기심 많은 4명이 모였고 오전에는 사진작가님이셨던 도슨트 님을 따라다니며 밀도 있는 시간을 보냈다. 스티브 잡스의 사진의 모티브가 된 뒤러의 자화상, 레드벨벳의 <Feel My Rythem> 뮤비에 영감을 준 히에로니보스 무스의 <세속적인 쾌락의 동산>, 고야의 집 벽면에 그려져 그의 처절한 삶을 보여주는 <자식을 삼키는 사투르누스>까지. 3시간의 투어가 부족하게 느껴질 만큼 엄청난 몰입감으로 그림 하나하나를 살펴본 뒤 미술관을 나왔다.
미술관을 나와서도 단순히 시각적 잔상이 아른거리는 정도가 아니라, 한 사람의 깊이 있는 이야기를 들은 후처럼 기억에 그림이 새겨진 듯한 느낌에 생생하고 충만한 기분이었다.
“이 그림 속 남자는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나요?”, “화가는 무슨 생각으로 그림을 그렸을까요?”, “가까이에서 보세요. 이 그림의 실물을 보는 건 이게 마지막일 수도 있잖아요.” 라며, 그림에 대한 설명을 가르치듯 늘어놓는 것이 아니라, 항상 먼저 이 그림이 어떻게 느껴지냐고 질문하셨다. 이렇게 내 안의 경험을 꺼내면서 그림을 마주하니 제목과 화풍과 같은 외부적 정보가 아니라 나와 작가, 그림 속 인물들이 어우러져 하나의 이야기로 다가왔다.
이 밀도 있는 경험이 잊힐 즈음, <눈이 보이지 않는 친구와 예술을 보러 가다>라는 책을 추천받아 읽게 되었다. 눈이 보이지 않는 사라토리 씨와 예술 작품을 감상하는 이야기로, 감상의 방법은 단순하다. 그림에서 느껴지는 점을, 보이는 것들을 자유롭게 이야기하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그림 그 자체보다 그림을 보는 내가 더 중요해진다. 시라토리 씨는 스스로도 잘 몰랐던 나의 관점과 경험을 꺼내주는 사람이다. 그러면서 미술은 느끼고 경험하는 것이라고 말로써 알려주는 것보다 훨씬 직관적으로 깨달음을 준다. 책을 읽다 보니 프라도 미술관에서의 시간이 유독 좋았던 것은 도슨트 님이 내 안의 것을 적극적으로 들여다볼 수 있도록 해줘서였다는 걸 깨달았다.
책을 읽으며, 그림의 이야기에 푹 빠졌던 시간들을 다시 떠올리니 어디로든지 그림을 보러 가고 싶어졌다. 그리고 고고하게 걸려있는 비싼 작품들을 고요히 감상하기보다, 보면서 함께 간 사람들과 실컷 떠들고 이야기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