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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쓰는 스텔라 Dec 27. 2023

인생 여전

"1, 12, 16, 19, 어, 십구! 23, 43……. 에이, 다 꽝이네! 어떻게 달랑 한 개만 맞냐."


 이번 주는 꿈이 좋아서 내심 기대했는데 혹시나는 무슨 역시나였다. 

불나는 꿈은 꼭 복권 사야 한대서 일부러 생방송 시간까지 기다려서 당첨을 확인했는데 '꽝이다 꽝'. 

그럴 거면 꿈꾸지 말고 꿀잠이나 푹 잤으면 좋았을걸. 

 사실 나는 꿈을 자주 꾸는 편이기 때문에 보통은 꿈 때문에 복권을 사지는 않고 복권 파는 곳을 지날 때 현금이 있으면 사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슬프게도 5등조차 당첨된 적이 없어 내 복권 용지는 번호를 확인하는 족족 쓰레기통으로 직행하기 마련이다. 당첨만 된다면 정말 단돈 1원도 낭비하지 않고 알차게 잘 써줄 자신이 있는데 왜 복권의 여신은 나를 외면하시는가.



 내 생애 첫 복권 구입은 아빠 심부름이었다. 아빠가 즉석 복권에 당첨되어 바꾸러 가셔야 했는데 한창 심부름하기에 맛 들렸던 여덟 살 꼬맹이는 본인이 가겠다며 나섰다. 당첨된 복권을 내고 새로 받은 복권을 복권판매소에 있던 동전으로 조심스레 긁어보았다. 

세상에! 긁힌 스크래치 부분에 2000만 원이라고 찍힌 그림이 있는 것이다! 

2000만 원이면 그 당시 서울에 있는 아파트를 살 수도 있는 가격이었다. 당연히 그런 것까진 몰랐어도 2000만 원이 엄청나게 큰 금액이란 건 알았다. 

‘내가 1등인 걸 알면 누가 뺏어갈지도 몰라. 빨리 아빠한테 보여드리자!’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복권이 혹여 바람에 날아갈까 봐 두 손으로 꼭 부여잡고, 뛰다가 넘어질까 봐 최대한 빠르게 걸어 집으로 돌아갔다. 


 현관문을 열자마자 "아빠! 복권 1등 됐어!"를 외치며 자랑스럽게 두 손을 내밀었다. 화들짝 놀라시며 복권을 받아보신 아빠는 이내 웃음을 터트리셨다. 복권 왼쪽에 있는 그림 두 개가 동일해야 오른쪽에 있는 금액을 받는 것인데 복권이라곤 사본 적이 없었던 꼬꼬마는 스크래치 안쪽에 숨겨 있는 금액이 그대로 당첨된 거라고 믿었던 것이다. 

 진실을 알고 실망하는 나에게 아빠는 웃으시며 "그거 가지고 오는 십 분 동안 당첨된 줄 알고 기분 좋았잖아. 그랬으면 된 거지. 우린 돈으로는 못 사는 행복에 당첨된 거야. 네 덕분에 아빠도 당첨된 줄 알고 기분 좋았으니 두 배로 당첨된 거네!" 하셨다. 


그 기억이 너무나 선명해서 아직도 ‘복권’하면 당첨보다는 그날 아빠의 웃음소리와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시던 큰 손이 더 먼저 떠오른다. 2등도 3등도 안되고, 1등 당첨 정도는 되어야 이 날의 추억을 이길 수 있을 것 같다. 


 

 복권을 사고 추첨 일까지 ‘설레임(맞춤법으로는 '설렘'이지만 그 단어로는 이 간질간질한 느낌이 안 산다)의 값’ 5천원! 이 정도면 일상의 소소한 행복 값으로 나쁘지 않다. 생각해 보니 인생‘역전’을 꿈꿔야 할 만큼 내 인생이 나쁜 건 아니니까. 인생‘여전'도 좋지만, 그래도 이왕이면 좀 풍족한 상태로 하는 인생'여전'이 낫겠지? 오늘 살 복권은 QR코드를 찍었을 때 '축하합니다!' 문구가 나오기를 기대해 본다. 

평소보다 조금 더 간절한 마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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