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인간, 보는 인간, 듣는 인간.
여유 시간이 생겼을 때 무엇을 하는지 이 셋으로 나눈다면 나는 단연코 읽는 인간이다.
나에게 유튜브 보는 건 시간 낭비며, 유료 OTT 서비스 구독은 돈 낭비다. (이는 멍 때리기가 취미이며, 맥시멈라이프를 즐기는 소비 요정인 글쓴이의 100% 주관적 의견임을 양해 바랍니다.) 최근 화제가 된 드라마는 한 편도 본 적이 없으며, 영화관에 가는 일도 즐기지 않는다.
처음부터 끝까지 본 드라마가 첫째 임신 때 전지현 닮은 딸, 김수현 닮은 아들이 태어나길 바라며 본 '별에서 온 그대'일 정도니까. 태교의 간절함도 유전자의 힘을 이기긴 어려워 나와 남편을 똑 닮은 아이가 나온 걸 보고 둘째 때는 그마저도 안 해 십 년은 족히 넘은 일이니 ‘보는 인간’은 절대 아니다.
그렇다면 ‘듣는 인간’ 쪽은 어떨까?
음악 듣는 걸 좋아하고, 집안일을 하며 종종 노래도 흥얼거리지만 우선순위에서 밀린다.
“책 읽으면서 음악 들어야지" 하며 애청곡들의 Playlist를 켜도 막상 책에 빠져들기 시작하면 집중하는데 방해된다며 채 세 곡을 넘기지 못하고 꺼버리는 사람이 바로 나다.
이어폰에 최적화되지 못해 삼십 분만 끼고 있어도 두통을 유발하는 귓구멍 탓도 무시 못 한다.
그럼, ‘듣는 인간’도 탈락.
나름 객관적으로 분석해 봐도 역시나 나는 ‘읽는 인간’이다.
재미있는 영상도 그대로 보기보다는 일명 '짤방'이라 하여 장면, 장면을 캡처한 게시글로 보며, 새로운 물건을 사도 동영상으로 된 QR코드 보단 종이로 된 설명서를 하나, 하나 읽어보는 걸 더 좋아한다.
지금이야 일과 육아, 집안일에 치여 여유를 가질 수 있는 시간이 적으니 고르고 골라 신중하게 읽을 책을 선정하지만 결혼 전만 해도 나는 '다독파'였다. 그냥 활자라면 닥치는 대로 읽었다. 일 년에 책 백 권을 읽는 일은 식은 죽 먹기였고, 각자가 애정하는 책을 교환하여 읽는 책 친구가 있었으며, 교보문고의 VIP 회원이었고, 독서기록 전용 앱까지 구매했었다.
결혼 후 곧바로 이어진 임신, 출산, 육아 덕분에 즐겨 읽던 소설이나 에세이는 육아서와 유아식 요리책으로 대체되었고 끝까지 읽는 책이 손에 꼽도록 줄어들었지만 그래도 얼마 안 되는 여유시간에는 여전히 TV시청이나 유튜브 구독 대신 책을 손에 들었다.
요즘은 아무래도 스마트폰 때문에 ‘보는 인간’이 많아졌다. 이십여 년 전 대학을 다닐 때만 하더라도 지하철에서 책 읽는 사람들이 심심찮게 있었는데 요즘은 사람이 하도 많아 지옥철로 악명 높은 9호선 급행열차에서도 책 읽는 사람은 한 칸에 한두 명도 보기 힘들다.
지인들과의 채팅방에서도 백만 구독자를 가진 인기 유튜버의 최근 영상, 어제 본 드라마의 내용, 새로 개봉한 영화 얘기들은 하지만 책 이야기를 하는 건 극히 드물다.
그래도 나는 꿋꿋하게 ‘읽는 인간’의 길을 가련다.
‘보는 인간’들 사이에 고고히 선 ‘읽는 인간’이란 시대를 앞서가는 지식인인양 생색내기 쉽고 남들 앞에서 우쭐대기에도 그만이다.
아이들이 궁금한 것을 물어볼 때, 네이버 뺨치는 내용을 빠르게 알려주면 "엄마 최고!" 하는 찬사와 함께 쌍따봉과 볼뽀뽀를 받을 수 있다. 남편하고 말다툼할 때, 객관적(!)인 증거 제시로 확실한 승리도 거머쥘 수 있다. 물론 기억 용량의 한계로 인해 100% 정확한 내용이 아닐지라도, 일단 그 상황을 모면할 수 있는 지적 여유로움이 든든하게 장착되는 것이다.
‘읽는 인간’의 이유가 이런 속물적인 것이면 좀 어떠하리. 내 안에 쌓이는 지식들만 옹골차면 그만인 것을.
이제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쓰는 인간'으로의 진화를 꿈꾸는,
나는 '읽는 인간'이다.
*참고로 글쓴이와 1도 안 닮은 저 사진은 AI를 이용하여 만든 이미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