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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쓰는 스텔라 Mar 13. 2024

달콤쌉싸름한 추억의 맛

나는 기념일을 잘 챙기는 타입이 아니다. 내 생일도 무던히 지나가는 편인지라 ‘밸런타인데이’니 ‘화이트데이’니 하는 족보도 없는 서양식 기념일에는 더더욱 그러하다. 그래도 굳이 사준다는 사람을 말리진 않기 때문에 동료들과 같이 회사 앞 편의점에 들렀다. 이것저것 간식들을 고르고 계산을 하려다 보니 포스 가까이에 큰 ‘츄파춥스탑(이거 쓰려고 검색하다 알았다. 정식이름은 ‘슬림휠’이라고 한다) ‘이 눈에 들어왔다. 그땐 더 컸던 거 같은데 지금 봐도 크긴 엄청 크구나.                                                    

                                                                    

이게 바로 츄파춥스 슬림휠!


예전에 다녔던 직장에서 다양한 업무를 했지만, 그중에 하나가 회사에 소속된 선수들을 관리하는 일이었다. 그 선수들을 위해 사용하는 비용은 회사의 다른 비용들처럼 재무팀에서 처리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일차적으로 자료를 정리해서 넘기면 재무팀에서는 집행만 했었다. 사실 내가 입사하기 전까지는 재무팀에서 바로바로 처리했는데 직장인이 아닌 선수들이다 보니 회사의 행정처리 절차를 무시하고 말도 안 되는 영수증을 제출하곤 해서 재무팀에서 항의가 많았던 모양이었다. 결국 우리 팀과 재무팀이 한발 씩 양보하여 중간에서 한 명이 정리해서 되는 건 넘기고, 안 되는 건 빼자고 했는데 의외로 이게 하나하나 처리할 게 많았다. 그러다 결국 고래 싸움에 새우등 터진 격으로 힘없는 막내인 내가 일을 맡게 된 것이었다.  


나는 어떤 일을 하기 전까지는 최선을 다해 피하려고 하지만, 일단 (자의든 타의든) 하게 되면 좋은 결과를 내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는 편이다. 안 하면 안 했지, 대충대충 하는 것은 내 자존심 상 용납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잘 모르는 일이지만 공부도 많이 하고, 선수들과도 친해지려고 노력을 했다. 하지만 아무래도 남자 선수들이다 보니, 20대 누나는 낯설고 어색했던 것 같다. 그래서 하나라도 더 챙겨주려고 하고, 하나라도 더 도움이 되는 일을 알아보기 위해 동동거리던 담당 직원인 나보다 우리 팀에서 같이 일하는 남자 직원과 더 격의 없이 지내는 선수들이 조금은 야속하기도 했었다.


그날도 어김없이 쌓인 일을 처리하기 바빴던 날이었다. 우편실에 다녀온 선배가 내 책상 위에 커다란 박스를 쾅하고 내려 두었다.


“앗 깜짝이야. 이게 뭐예요?”

“너는 뭐 이렇게 큰 택배를 주문했냐? 들고 오느라 무거웠잖아!”

“저 회사로는 택배 안 시키는데요. 잘못 온 거 아니에요?”

“야, 눈 있으면 여기 봐라! 네 이름 딱 쓰여 있네!”


라면 박스 정도의 큼지막한 상자에는 엄청 큰 글씨로 ‘스텔라 대리님께’라고 똑똑히 적혀있었다. 운송장도, 보낸 이도 없이 내 이름만 있는 거라 수상하긴 했으나 별 일 있겠나 싶어 뜯어본 순간!

거대한 츄파춥스와 각종 봉지 사탕, 초콜릿, 과자들이 상자 가득 들어있었다. 아니 이게 다 뭐지? 어안이 벙벙하여 안을 뒤적뒤적하였더니 L자 파일 안에 뭐라고 적힌 종이가 있었다.

삐뚤빼뚤한 손 글씨로 가득 찬 그 종이는 선수들이 나를 위해 작성한 롤링 페이퍼였다.


- 스텔라 누나! 저희 때문에 많이 힘드시죠? 저희 챙겨 주느라 애쓰는 거 다 알아요.

- 스텔라 대리님 앞으로는 말 잘 들을게요. 이상한 영수증도 안 보낼게요.

- 스텔라가 최고다! 킹왕짱!

- 오늘 오면 파티해주려고 했는데 바쁜척하고 나빠요!


울컥한 마음에 멍하니 롤링 페이퍼만 보고 있는데 코치님께 상자 잘 받았냐고 전화가 왔다.

알고 보니 오늘이 화이트데이라고 선수들이 사비를 모아 숙소 앞 구멍가게를 털었단다. 숙소에 오면 깜짝 파티를 해주려고 했는데 그날따라 너무 바빠서 내가 못 가게 되자, 회사로 상자를 보내서 챙겨준 것이었다.

아... 내 마음을 몰랐던 게 아니었구나, 그냥 어색해서 그랬던 거였구나. 그런 줄도 모르고 속 좁게 생각하고 가벼운 원망까지 했던 내가 부끄러워졌다.   


그날 우리 팀뿐만 아니라 다른 팀까지 돌아다니면서 “우리 선수들이 화이트데이라고 저 챙겨준 건데 혼자 먹기엔 너~무 많아서 나눠드려요!” 자랑 아닌 척 자랑을 마구 하며 사탕을 뿌렸다. 자랑타임 때문에 일을 다 못해서 결국 야근까지 했던 건 안 비밀이지만, 그전으로도 그 후로도 이것을 능가하는 화이트데이 선물은 없었다.


평소에는 사탕 보단 초콜릿을 더 좋아하는 나지만 오늘따라 그때 그 추억이 생각나서 계산 마지막에 “이것도 계산해 주세요!” 하며 막대사탕 하나를 더 넣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진심이 담긴 사탕의 맛은 참 달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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