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생 때 담임선생님(이하 담임쌤)은 내가 물리를 포기하는데 결정적인 영향을 주셨지만 그 외에는 너무나 재밌는 분이셨다. 반 아이들과 함께하는 시간이 많았고, 몇몇 아이들과는 조금 더 친하게 지내셨다. 보통 편애의 대상이 되면 다른 아이들의 질투를 사기 마련인데 그 아이들은 선생님의 각종 잡무를 도맡아 했기 때문에 딱히 부러워하는 애들은 없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나는 선생님의 사랑을 받았던지라 그만큼 선생님과 많은 시간을 보냈다. 내가 중학생일 때는 토요일에도 학교를 가는 날과 일명 '놀토'라고 해서 학교를 가지 않는 토요일이 격주로 있었는데 그때마다 선생님은 우리들을 불러다 같이 시간을 보냈다.
담임쌤과 절친이고 나와도 친한 체육선생님(이하 체육쌤)이 있었는데 그 반도 우리 반 같은 잡일 멤버들이 있었고, 그러다 보니 점차 같이 어울릴 일이 생겼다. 우리 학교는 남녀공학이긴 했으나 남녀합반은 아니어서 다른 친구들은 체육쌤네 반 남자아이들과 있는 걸 부끄러워했다. 보통의 사춘기 여학생이라면 그렇게 내외하는 게 맞는 건가 싶기도 하지만, 나는 원래 그런 걸 따지지도 않거니와 그들 중 초등학교 동창 몇몇이 있었기 때문에 친구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남자아이들을 편하게 대했고 두 반의 중간 다리 역할을 하게 됐다. 처음에야 다들 어색했지만 조금씩 친해지다가 결국은 커플까지 탄생하게 된 봄날의 이벤트가 있었다.
그 당시 체육쌤은 기러기 아빠여서 반 아이들과 여기저기로 많이 놀러 다니셨다. 그러던 중 중간고사가 끝나고 체육쌤이 그 반 아이들과 강촌으로 엠티를 간다는 고급정보를 입수하였다. 담임쌤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체육쌤네 반이 차려놓은 계획에 숟가락만 몇 개 더 얹자며 우리를 꼬드겨 여학생 7명과 남학생 한 반, 선생님 두 분의 엠티 계획이 수립되었다. 아이들끼리 가는 여행인 줄 알고 걱정하셨던 부모님은 담임쌤의 전화 한 통에 바로 허락을 해주셔서 내 생애 최초의 엠티는 대학 신입생이 아닌, 중학생 어느 날 좋았던 봄날에 강촌으로 가게 되었다.
처음 타본 경춘선 열차에서 배낭 가득 챙긴 간식을 먹다가 졸다가 구경하다 도착한 강촌역,
마중 나온 체육쌤의 낡은 르망 승용차에 두 명씩 겹쳐 타고 커브길마다 꺄아~ 소리를 질러댔던 숙소 가는 길,
돌쇠들(체육쌤네 반 아이들)이 구워서 바친 삼겹살 바비큐 덕분에 더 맛있었던 저녁 식사,
먼저 잠든 아이들 방에 들어가 얼굴에 낙서하다 거꾸로 마주 본 상태에서 갑자기 눈이 마주쳐 서로 놀라 비명을 지르며 방에서 뛰쳐나와 심장이 터질 뻔했던 기억과
봄꽃들 사이에서 수건 돌리기를 하고 잡기 놀이를 했던 시간들.
시험도 끝났겠다, 날씨마저 끝내주게 좋았겠다, 대학생 언니 오빠들 사이에서 (당연하지만) 술 한 방울 없이도 신나고 재미있게 우리만의 봄날을 즐겼다.
여름에도, 가을에도, 겨울에도 각 계절에 맞는 좋은 장소로 다 같이 또 놀러 가자는 다짐과 함께 우리의 첫 엠티는 성공적으로 마쳤다.
비록 나중에 교장선생님한테 들켜서 쌤들이 혼나는 바람에 우리의 엠티는 단 1회로 끝나고 말았지만, 지금도 ‘엠티’하면 신입생 때 동일한 장소로 갔던 엠티보다 더 기억에 남은 추억들이다. (대학 신입생 때 엠티는 과다한 알코올 섭취로 인해 절반은 기억이 날아간 탓도 있다)
지금은 두 분 다 멀리 계셔서 자주 못 뵙지만 그래도 뵐 때마다 이 날의 엠티 얘기는 빠지지 않는다. 벌써 강산이 몇 번 바뀔 정도의 시간이 흐른 일인데도 아직도 재밌고 대화할 때마다 새로운 이야깃거리가 생각나는 게 신기할 정도다.
아! 여기서 탄생했던 풋풋한 중딩커플은 돌아오는 기차 안에서 손을 잡더니 졸업식에서도 같이 사진을 찍을 만큼 꽤 오래 사귀었다. 아쉽게도 둘 다 나와 다른 고등학교를 가는 바람에 그 이후의 소식은 잘 모르겠다. 그래도 봄날 꽃잎들이 흩날릴 쯤이면 늘 생각나는 예쁘고 싱그러운 추억이란 것만큼은 확실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