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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쓰는 스텔라 May 08. 2024

연극 컬렉티드 스토리즈

직장인의 가성비 문화생활 1편

 발 넓은 지인 덕에 종종 초대권을 얻어 공연을 보곤 합니다.

저의 취향을 반영하거나, 제가 보고 싶은 작품을 골라 보는 것이 아닌지라 어떤 때는 공연 당일 공연명과 장소, 시간만 알고 공연장에 입장하곤 하지만 그래서 더 숨겨진 보석 같은 작품을 만나기도 합니다.

에세이를 채울 제 빈곤한 소재가 바닥났거나, 마음에 드는 공연을 만났을 때는 공연 리뷰로 에세이를 대체하고자 합니다.  앞으로 시리즈로 나갈 수 있을지 게으른 미래의 나를 완전히 믿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현실의 나는 당당히 1편으로 시작해 봅니다.


'컬렉티드 스토리즈'는 미국 작가 도날드 마굴리스의 대표작인 여성 2인극이며 대략의 줄거리는 이렇다.

50대 유명 단편소설 작가이자 대학교수인 루스는 예술가답게 예민하고 까다로운 성격의 소유자지만, 가르치는 일을 즐긴다. 평소 루스를 동경하던 대학원생 리사는 글쓰기 개인 지도를 받기 위해 루스의 집을 방문한다. 처음에는 삐걱대며 잘 맞지 않는 듯 보이던 두 사람은 곧 사제지간을 넘어 친구, 그리고 동료가 된다. 시간이 흐르고 리사가 첫 장편소설 출판 기념회를 하는 날, 루스는 그 자리에 나타나지 않는다. 그날 밤 리사가 루스의 집을 찾고, 두 사람의 관계는 전혀 다른 국면으로 치닫는다.



이런 정통극은 오랜만인지라, 게다가 여성 2인극인지라 다소 지루하지 않을까 걱정도 했었지만 두 배우는 깊이 있는 연기로 110분을 꽉 채웠다. 요즘 창작 뮤지컬을 많이 봐서 출연자들의 애매한 발음과 억양에 나도 모르게 익숙해져 있었는데 정확한 발음과 호흡으로 하는 대사를 듣다 보니 좋았다. 독백은 거의 없고(출판 기념회에서 리사의 낭독 정도), 상대방과 대화를 주고받으며 진행하는 연극이라 둘의 합이 중요한데 대화의 내용을 통해서도 두 사람과의 관계의 변화를 알 수 있다. 루스가 다소 일방적인 가르침만을 전했던 초반부, 둘이 동등한 동료이자 친구가 되어 서로의 작품을 논하는 중반부, 이제는 스승을 넘어서는 작가가 되려는 리사가 늙고 병든 루스와 설전을 벌이는 후반부. 둘의 관계는 시간이 갈수록 변화하고 그래서 어쩌면 서글퍼진다.


극 초반부는 아직 작가 지망생인 리사가 루스에게 글쓰기에 대한 지도를 받는데, 그러면서 주고받는 대화들이 내가 글을 씀에 있어서 여러 가지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었다.  

그런데 더 놀라운 일은 초반부에는 "아, 그렇구나" 했던 루스의 가르침이 후반부에서 리사와 루스의 갈등을 심화하는 수단이 되어버렸다는 점이다. 이건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인 건지, 아니면 가르치는 자의 의도와는 상관없는 배우는 자의 받아들임 탓인지는 잘 모르겠다. 좋은 글을 쓰는 데 있어서도 '도덕적 가치'가 우선이 되어야 하는 건지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용인될 수 있는 건지 나름 묵직한 여운을 남겼다.


이벤트에 참가하기 위함이 아닌 정식 리뷰는 처음 써봐서 스포일러가 되지 않는 감상을 남기는 것이 생각보다 어렵다는 것을 알았다. 오늘은 1편이니 앞으로는 점차 나아지겠지.

산울림 소극장은 근처는 많이 지나가봤지만 정작 극장 안에는 한 번도 들어가 본 적 없는 곳이었는데, 비가 엄청 오는 날의 지하 공연장임에도 불구하고 꿉꿉함 없이 아늑하고 고전적인 매력이 있었다. 미술 작품의 한 장면 같은 무대 배경도 한몫하는 것 같지만.

그리고 내가 이 연극을 본 날이 극단 산울림의 대표이자 연극계의 거장이신 임영웅 님의 사망소식을 들은 날이었다. 이 자리를 빌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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