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앉을까?”
점심시간이라 북적거리는 소음을 뚫고 고막에 꽂힌 저 한마디에 바로 알아챌 수 있었다.
그 목소리의 주인을.
회사 근처 식당. 다른 직원들과 함께 앉아서 음식이 나오길 기다리던 중이었다. 핸드폰을 보느라 고개를 숙이고 있어서 눈으로 확인한 것이 아니래도, 하루에 15시간 이상 붙어있던 사람의 목소리를 틀릴 리 없었다.
반가운 마음에 소리가 들린 쪽으로 번쩍 고개를 든 것도 잠시, 후딱 고개를 숙이고 아는 척을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했다. 우리의 마지막 통화가 기억난 탓이었다.
그분은 내 사수였다.
엄청나게 힘들었던 첫 직장 시절, 그분의 도움으로 나는 조금씩 회사에 적응했다. 함께 고생도 많이 했지만 그래서 더 끈끈한 사이였다. 내가 좋지 않게 회사를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그분과는 계속 연락을 이어갔고 서로의 경조사에도 참석했다. 마지막으로 본 것은 벌써 몇 년 전, 전(前) 직장 동료의 결혼식장이었던 것 같다.
퇴사하고 잠시 쉬다가 이직하려 했던 자리가 직장 내 사정으로 인해 채용 취소가 되었다. 그리고 다시 취업을 하려 했으나 생각처럼 쉽지 않았다. 처음에야 미친 듯이 일했으니 좀 쉬는 시간을 갖자고 생각했지만, 그날들이 하루하루 늘어나자 자존감은 바닥으로 떨어졌고 꼭 필요한 일이 아니고서는 사람을 만나지 않게 되었다.
흔히들 하는 “요즘 뭐 하고 지내? 잘 지내?”라는 일상적인 안부의 말이 어떤 사람에게는 참으로 아프게 다가온다. 할 말이 없기 때문이다. “취업 준비 중이야.” “그냥 쉬는 중이야.” 이런 가벼운 한마디에 ‘조언’의 탈을 쓴 무거운 잔소리가 수십, 수백 마디가 돌아온다. 물론 나를 걱정해서 하는 말인 경우도 많다. 하지만 그 ‘다정한 오지랖’을 감당하기엔 내 깜냥이 그렇게 크지 못했다. 그런 대화를 나누는 것 자체가 스트레스였기 때문에 그럴 상황을 만들지 않았다. 그러면서 그분과의 연락도 차츰 뜸해졌다.
역경과 고난의 시간을 이겨내고 난 다시 취업을 했다. 새 회사에 적응하느라 정신없던 무렵에, 계속 그 회사에 있던 친구가 우울한 목소리로 전화를 했다. 회사의 경영난으로 인해 몇 개의 부서가 없어지게 되었고, 나와 사수와 친구가 있던 부서가 거기에 속했다고. 이직하거나 다른 부서로 이동해야 하는데 그것도 쉽지 않겠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는 상황이 반대가 되었다. 친구들이나 지인들한테 슬쩍 그분은 어떻게 지내는지 물어보았으나 퇴사했다는 것만 알지 어디서 근무하는지 모르겠다는 말이나 연락 끊긴 지 오래라는 말만 되돌아왔다. 다들 좋지 못한 일로 뿔뿔이 흩어지니 운 좋게 이직에 성공한 몇몇의 안부만 간간이 들려올 뿐, 그분의 소식은 없었다.
그렇게 또 시간이 흘렀다.
마지막 통화는 코로나가 한창이던 때였다. 시국이 흉흉한지라 갑자기 꿈에 나온 그분이 마음에 걸려 전화를 드렸다. 몇 번의 신호음 끝에 연결이 되었으나 “내가 지금 회의 중이라서 이따 다시 연락할게.”라고 하곤 금방 끊겼다. 그러고 나선 다시 전화가 오지 않았다.
그 전의 통화도 마찬가지였던 것 같다. 그때는 출장 중이라고 했었던가?
그제야 알았다. 나와 통화하기 싫어서 핑계를 댄 것이구나.
그 마음이 어떤 건지 알 것 같았지만 모르고도 싶었다.
마지막 통화의 기억 때문에 나는 머뭇거릴 수밖에 없었다. 같은 회사에서 근무할 땐 정말 가까웠던 사이였는데. 그때는 다른 층에서 우연히 만났을 때마저 반가워했었는데. 이렇게 몇 년 만에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장소에서 만났는데도 아는 척을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망설이게 되는 사이가 되다니. 시간이 흘러가며 변해버린 상황이 서글펐다.
생각해 보면 이런 엇갈림이 한두 번은 아니었다. 어쩌다 보니 또래들보다 딱 반 발자국씩만 먼저 간 탓에 합격에 희비가 갈렸던 고 3 친구들도, 취업에 따라 졸업식 참석여부가 나뉘었던 대학 동기들과도 서서히 연락이 끊겼다. 한동안 추억 속에만 머물러 있던 온도를 깨워 나에게 소식을 전할 만큼 그 인연의 온도가 높지 못했던 탓이리라. 내가 가진 온도가 상대방에게 너무 뜨거울까 봐 차마 먼저 연락하지 못하고, 그렇다고 차갑게 끊어내기엔 그와 나누었던 온도가 아직 따뜻했다.
모든 인연이 다 마찬가지인 것 같다. 각자가 가지는 인연의 온도에 따라 뭉근하게 이어나가기도 하고, 언제 뜨거웠던 적이 있었냐는 것 마냥 흐지부지 사라지기도 하는 거겠지.
곧 주문한 음식이 나왔다. 평소와는 달리 깨작깨작 대며 다른 직원들의 대화를 흘려들으면서 식사를 마칠 때까지 계속 고민한 끝에, 결국 나는 마스크를 쓰고 모르는 척 그 테이블을 지나쳤다.
예전 회사에서 나온 사람들이 차린 회사가 근처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아마 거기서 근무하기로 했으면 또 이렇게 우연히 마주칠 날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때는 반갑게 웃으면서 안부를 물을 수 있을까? 그러고 싶지만 왠지 자신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