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n년을 살았지만 이처럼 심한 적은 결단코 없었다. 동남아나 UAE도 가봤지만 이보다는 나았다. 2024년 여름, 한국의 날씨는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이었다. 덥고, 습하고, 또 더웠다. 가끔 내리는 비조차 습기만 잔뜩 뿌리고 갈 뿐, 더위를 식혀주진 않았다.
세기의 발명가 캐리어 선생님의 은혜로 실내나 대중교통 안에서는 그나마 괜찮다. 하지만 지하철역에서 나와 회사까지 걷는 180m나 집으로 가는 버스를 기다리는 시간 같이 에어컨의 은총에 닿지 못할 때면 나의 몸은 반쯤 녹은 아이스크림처럼 흐물흐물해지고야 만다.
열대야 탓에 밤새 잠을 설치고 겨우 일어나 출근하고 일하고 퇴근하고 집에 오면 KO패 당한 복서처럼 한동안 현관 앞에 쓰러져 있는다. 아직 집안일과 육아가 남아있지만 그냥 이대로 오늘 하루 일정을 끝내고 누워있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다. 책 읽기도, 글쓰기도, 그 어떤 것도 할 기력이 없었다. 생존을 위한 최소한의 활동만으로 근근이 하루를 버티기에 급급했다. 더위는 나를 무기력의 늪에 빠뜨려버렸다. 정말 아무것도 하기가 싫었다. 가뜩이나 빈약한 글감 주머니에선 새로운 인풋이 없으니 아웃풋도 나오지 않았다. 몇 개의 글을 쓰다 말다, 다시 서너 줄 쓰다 접다 하길 반복하다 결국 지난주에는 브런치에 올릴 글쓰기를 포기해 버렸다. 앞으로 맞이할 여름 중에 올 해가 가장 시원하다던데... 내년에는 또 어떤 여름이 올지 벌써부터 두려울 지경이었다.
'처서매직(음력 절기 상 처서가 지나면 모기 입이 비뚤어진다는 속담이 있을 정도로 아침저녁 선선한 날씨가 된다는 뜻)'이 지나고 살짝 누그러든 더위가 9월의 이름값에 맞게 한 단계 낮아진 온도를 내어주자 드디어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종종 글감이 떨어지면 가벼운 차림으로 매의 눈을 장착하여 동네를 산책하곤 했다. 이것저것 둘러보고 천천히 걷다 보면 갑자기 새로운 글감이나 지나간 추억이 떠오를 때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올여름에는 이 방법을 쓸 수가 없었다. 글감을 생각하기는커녕 숨이 턱턱 막혀오는 더위는 냉기에 대한 갈망만을 불러일으킬 뿐이었다. 땀은 나지 않을, 그러나 에어컨이 있는 곳에 최대한 빠르게 도달할 수 있는 속도로 진격해야 했기에 주위를 둘러볼 여유 따윈 없었다.
더위가 약간 가셨다고 하나 그래도 아직은 산책하기 좋은 날씨는 아니다. 이럴 때는 내가 사랑하는 장소인 도서관으로 가야 한다. 독서모임에서 만난 작가님의 책 중 아직 읽지 못한 책과 그가 추천해 준 책 서너 권을 골라 들고 기분 좋은 서늘함이 가득한 자리에 앉았다. 억지로라도 집어넣으면 뭐라도 나오길 바라지만 생각처럼 쉽지 않다. 내가 뭐 거창한 작가라고 감히 ‘슬럼프’란 말을 갖다 붙여도 되나. 그래도 글이 안 써지는 것이니 ‘글럼프’는 맞지 않을까? 마음에 들지 않아도, 일기장에나 쓸 글이더라도 일단은 써보자. 복잡하게 생각한다고 잘 써지는 것도 아니다. 안 하는 것보단 못하는 게 낫다. 그 마음으로 오늘도 읽고 생각하고 쓴다.